17세기 파리의 살롱은 단순한 모임이 아니었다. 아이디어가 세상을 바꾸던 커뮤니티였다. 그곳에 모인 것은 관료도 군대도 아니었다. 작가와 과학자, 철학자와 예술가처럼 서로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한 방에 모여 밤새 생각을 주고받았다.
디드로의 『백과전서』도, 볼테르의 사유도 그 살롱이라는 커뮤니티 안에서 자라났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그것이다. AI가 모든 것을 자동화하는 시대에 인간이 인간과 연결되는 공간, 생각이 교환되고 신뢰가 쌓이며 ‘함께’라는 감각이 자라나는 커뮤니티다.
만들기는 공짜가 되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무언가를 만드는 능력은 그 자체로 희소했다. 글을 쓰고, 이미지를 그리고, 코드를 짜고, 영상을 편집하는 일에는 시간과 훈련이 필요했다. AI가 그 벽을 무너뜨렸다. 이제 누구나 몇 분 만에 그럴싸한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
만들기가 공짜가 되면, 희소함은 반대편으로 이동한다 — 무엇을 만들 수 있느냐가 아니라, 누가 그것을 원하고 믿어주느냐로.
만들기는 더 이상 경쟁력이 아니라 디폴트가 되었다.
이제 문제는 ‘파는 것’이다
공급이 폭발하면 주목은 고갈된다. 세상에 콘텐츠와 제품이 넘치는데 사람들의 시간과 신뢰는 그대로다. 병목은 ‘만들기’에서 ‘닿기’로, 더 정확히는 낯선 사람을 설득하는 일로 옮겨갔다.
낯선 사람에게 파는 일은 점점 더 비싸진다. 광고 단가는 오르고, 알고리즘은 변덕스럽고, 사람들은 광고에 무감각하다. 반대로 이미 나를 알고 신뢰하는 사람에게 전하는 일은 거의 공짜다. 바로 여기서 커뮤니티가 등장한다.
연결이 곧 시장이 되는 시대
크리에이터 이코노미의 성장과 창작자 수의 증가는, 연결과 신뢰가 시장에서 갖는 의미를 보여준다. Goldman Sachs는 2023년 크리에이터 이코노미가 2027년 약 4,80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조사와 연도에 따라 수치는 달라질 수 있다.
필요한 건 100만 팔로워가 아니라, 찐팬 1,000명이다
2008년 케빈 켈리는 유명해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당신이 만드는 모든 것을 사줄 ‘찐팬(true fans)’ 1,000명이면 충분하다고. 한 사람이 1년에 10만 원을 쓴다면, 1,000명이면 1억 원이다.
100만 명의 얕은 관심보다, 1,000명의 깊은 신뢰가 더 강하다.
AI 시대에 이 말은 더 강해진다. 얕은 도달은 AI가 무한히 복제하지만, 깊은 신뢰는 복제되지 않는다. 알고리즘이 실어 나르는 관심은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지만, 나를 믿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남는다.
커뮤니티가 새로운 해자다
경쟁자가 제품을 하루 만에 복제할 수 있는 시대다. 복제되지 않는 유일한 자산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다. AI가 제품을 상품화할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더 희소해지고 더 비싸진다.
커뮤니티는 네 가지를 동시에 해낸다. 첫째, 무엇을 만들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가장 먼저 알려주는 피드백의 원천이다. 둘째, 좋은 것이 사람을 통해 번지는 유통 채널이다. 셋째, 광고로 살 수 없는 믿음이 쌓이는 신뢰의 저장고다. 넷째, 제품은 베껴도 관계는 베낄 수 없다는 점에서 복제 불가능한 해자다.
살롱의 부활 — 좋은 커뮤니티의 조건
단체 채팅방 하나를 만든다고 커뮤니티가 되지는 않는다. 파리의 살롱이 그랬듯, 좋은 커뮤니티에는 공통의 조건이 있다.
다른 시선이 모여야 한다. 같은 분야의 사람들만 모이면 메아리가 된다. 서로 다른 경험이 부딪칠 때 새로운 생각이 태어난다.
서로 주고받아야 한다. 먼저 주는 사람이 중심이 되며, 커뮤니티는 거래가 아니라 호혜로 움직인다. 또한 한 번의 거래가 아니라 반복된 접촉이 신뢰를 만든다. 신뢰는 시간이 쌓아 올린 자산이다.
‘함께’라는 감각도 필요하다. 소속감은 콘텐츠가 아니라 관계에서 온다. 사람들은 정보가 아니라 머물 자리를 원한다.
커뮤니티 퍼스트로 일하는 법
제품보다 사람을 먼저 모은다. 팔 것이 완성되기 전에 관계를 시작한다. 청중이 아니라 참여자를 만든다. 단지 보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만드는 사람을 만든다.
도달이라는 숫자보다 신뢰의 깊이를 좇는다. 팔로워 10만 명보다 찐팬 1,000명이 중요하다. 대가를 요구하기 전에 가치를 먼저 흘려보내고, 꾸준히 나타난다. 커뮤니티는 이벤트가 아니라 리듬이다.
서로 다른 분야가 만나는 자리를 설계하며 경계를 섞는다.
사람이 사람을 연결한다
AI가 만들기를 끝낸 자리에서, 사람이 사람을 연결한다. 만들기가 공짜가 된 시대의 진짜 자산은 찐팬과 커뮤니티다.
300년 전 파리의 살롱처럼, 생각이 교환되고 신뢰가 쌓이는 자리를 먼저 만드는 사람이 다음 시대를 가져간다.
AI가 만들기와 온라인을 평준화할수록, 대체할 수 없는 장소·사람·경험의 값은 오른다. 로컬 브랜드는 AI로 무장하는 동시에 로컬로 차별화해야 한다.
AI 시대에는 자본과 기술을 쥔 대기업만 유리하다고들 한다. 실제로는 반대다. AI는 대기업과 소규모 브랜드 사이의 실행력 격차를 빠르게 좁히고 있다. 동시에 대기업이 아무리 자본을 부어도 복제할 수 없는 것—장소, 단골, 지역의 신뢰—은 로컬 브랜드의 손에 있다. AI 시대의 승부처는 바로 그 지점이다.
01 · 만들기도, 알리기도 평준화됐다
과거 로컬 브랜드의 벽은 자원이었다. 좋은 사진, 매끈한 카피, 홈페이지, 광고는 전문 인력과 예산이 있어야 가능했다. AI가 이 벽을 무너뜨렸다. 이제 1인 가게도 대기업 수준의 콘텐츠와 마케팅을 하루 만에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도구를 쓰면 결과물은 비슷해진다. AI가 만든 그럴싸한 것들이 넘쳐나며 온라인은 빠르게 획일화되고 있다. 만들기와 알리기가 평준화되면 차별화는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02 · 흔해질수록, ‘진짜’가 비싸진다
무엇이든 복제되고 자동화되는 시대에 사람들이 갈망하는 것은 오히려 반대편에 있다. 어디서나 살 수 있는 것보다 여기서만의 것, 완벽한 것보다 진짜인 것, 자동화된 응대보다 사람의 온기다. 로컬 브랜드는 이 모든 것을 이미 가지고 있다. 장소가 있고, 얼굴을 아는 단골이 있고, 동네의 맥락이 있다.
AI가 흔해질수록, 바로 이 ‘로컬’이 프리미엄이 됩니다. AI가 복제할 수 없는 유일한 자산은 장소와 사람 사이의 관계다.
숫자로 보는 변화
도구는 손에 들어왔고, 진짜가 값이 된다.
03 · AI로 무장하라 — 작아도 팀처럼
AI는 로컬 브랜드에게 ‘없던 팀’을 붙여 준다. 마케터, 디자이너, 데이터 분석가, 통역가의 역할을 AI가 나눠 맡는다.
콘텐츠·SNS·마케팅은 기획부터 카피·이미지까지 하루 만에 만들 수 있다. 예약·문의 응대는 챗봇과 자동 응답으로 24시간 대응할 수 있으며, 관광객에게는 메뉴·안내·응대를 실시간 다국어로 제공할 수 있다. 상품·메뉴 기획에서는 아이디어와 네이밍, 시즌 기획을 빠르게 돕고, 리뷰·수요·재고 데이터 분석을 통해 감이 아니라 근거로 판단하게 한다.
04 · 로컬로 차별화하라 — AI가 못 베끼는 것
AI로 효율을 높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진짜 해자는 AI가 복제할 수 없는 곳에 있다.
그것은 여기서만 경험할 수 있는 공간과 분위기인 장소성, 이름을 부르는 사이에서 쌓여 광고로 살 수 없는 단골과의 신뢰, 브랜드를 함께 키우는 지역 커뮤니티다. 또한 왜 이 일을 하는가에 담긴 진짜 이야기와 진정성, 그리고 화면 밖에서만 가능한 감각과 기억의 오프라인 경험이 있다.
05 · 안쪽은 AI로 압축하고, 바깥쪽은 로컬로 깊게
운영·마케팅 같은 ‘안쪽’ 업무는 AI로 압축해 시간과 비용을 아끼고, 그렇게 확보한 여력을 고객 경험·관계·공간 같은 ‘바깥쪽’에 되돌린다. AI로 아낀 시간이 사람과의 시간으로 바뀔 때, 로컬 브랜드는 대체 불가능해진다.
시작은 거창한 혁신이 아니라 반복 업무부터—확실한 기준을 세울 수 있는 일부터다.
06 · 오늘 시작하는 로드맵
반복 업무부터 AI로 시작한다. 응대·게시물·정산처럼 자주, 규칙적으로 하는 일에 먼저 적용해 기준을 잡는다. 콘텐츠는 AI로 부담을 줄이되 우리만의 목소리로 꾸준히 내고, 관광객과 외지 고객에게는 AI로 언어 장벽을 없앤 다국어 대응을 제공해 상권을 넓힌다.
한 번 온 손님이 다시 오고 관계로 남도록 채널을 열어 단골을 커뮤니티로 만든다. 리뷰·판매·방문 데이터를 읽어 다음 결정을 내리고, AI로 아낀 시간은 공간·서비스·관계에 다시 투자한다.
07 · 놓치면 안 되는 것
AI를 남용해 개성과 진정성을 잃지 않는다. 획일화된 콘텐츠는 오히려 독이다. AI는 뒤에서 운영을 맡고, 사람은 앞에서 경험을 책임져야 한다. 고객 접점의 온기는 사람이 지킨다. 고객 데이터와 개인정보는 최소한으로, 투명하게 다뤄야 한다.
AI로 무장하고, 로컬로 남아라
도구가 평준화된 시대에 살아남는 것은 가장 큰 브랜드가 아니라 가장 대체 불가능한 브랜드다. AI는 뒤에서 일하게 하고, 사람과 장소는 앞에 세워야 한다. 그것이 로컬 브랜드가 프리미엄이 되는 길이다.
생성형 AI가 기획안·목업·데모·슬라이드, 나아가 동작하는 프로토타입까지 만드는 비용을 급격히 낮추면서 ‘만들기’는 디폴트가 되었다. 이제 교육의 변별은 결과물을 그럴싸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다. 시장에 실제로 딜리버리하고, 반응을 수집하며, 실패를 다음 시도의 자산으로 바꾸는 능력에 있다.
“만들기는 디폴트가 되었다. 이제 변별은 팔 수 있는가, 그리고 실패를 자산으로 바꿀 수 있는가다.”
MBL(Market-Based Learning·시장 기반 학습)은 교육학의 확립된 용어가 아니라, PBL(프로젝트 기반 학습)의 다음 단계로 제안되는 교육 모델이다. 시장, 즉 고객을 평가자로 세우고 딜리버리·판매·피드백을 학습 사이클의 종점으로 삼는다. 잘 정리된 실패 역시 자산으로 평가한다. 학생이 실제 사업을 운영하며 배우는 핀란드 팀아카데미 같은 선행 실험은 있었지만, MBL은 이를 AI 시대 전공 불문의 표준 교육·평가 체계로 일반화하려는 제안이다.
PBL의 한계, 발표장과 시장 사이
PBL은 ‘지식 암기 → 문제 풀이’ 중심 교육을 ‘실제 문제 → 프로젝트 수행’으로 끌어올린 중요한 진전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PBL은 발표장에서 끝난다. 그 구조는 ‘그럴싸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희소하다는 전제 위에 서 있었고, 생성형 AI는 바로 그 전제를 무너뜨렸다.
발표장의 완성도와 시장의 반응은 별개의 변수다. 허술해 보이는 결과물이 시장에서는 팔릴 수 있고, 그럴싸한 결과물이 시장에서는 외면받을 수 있다. 하루 만에 심사위원을 감탄시킬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면, 발표장 평가는 무엇을 측정하는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발표장은 학생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시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팔기’는 단순한 매출 만들기가 아니다. 시장에 전달하고, 고객 반응을 수집하고, 실패를 정리하는 전 과정을 훈련하고 평가하는 일이다. 여기서 판매는 결제·사전 주문·유료 예약·구독 전환·티켓 판매·커미션 수주처럼 타인이 돈·시간·정보를 걸었는가로 판단한다. 무료 다운로드 1,000건보다 유상 결제 3건이 더 강한 신호다.
MBL의 정의: 세 가지 이동
MBL은 평가자, 프로젝트의 종점, 그리고 실패의 의미를 동시에 바꾼다. 교수는 채점자에서 코치·디렉터로 이동하며, 발표는 사라지지 않되 사이클의 종점이 아니라 배움을 자산화하는 도구가 된다.
한 학기에 한 번, 시장 접촉 사이클
MBL의 단위는 과목이 아니라 사이클이다. 15주 학기마다 모든 참여 학생이 시장 접촉 사이클을 한 번 완주한다. 8학기 동안 최대 8회의 실전 검증 이력이 쌓이며, 이는 곧 실패 자산 기록일지가 된다.
성공이 아니라 검증을 채점하는 루브릭
제1원칙은 판매 성공 자체를 직접 채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판매에는 학생이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대신 시장 접촉의 진정성, 딜리버리의 완결성, 피드백 수집의 질, 그리고 이를 자산으로 정리하는 수준처럼 학생이 통제할 수 있는 행동을 평가한다.
“판매 0건이어도 A를 받을 수 있다 — 시장 접촉이 진짜였고 검증 보고서가 날카롭다면.”
반대로 판매가 있어도 지인 매출이거나 배운 것을 설명하지 못하면 C를 받을 수 있다. 평가가 바뀌면 학생의 도전도 바뀐다. 안전한 주제로 도망가는 대신, 배울 것이 많은 위험한 가설에 도전하게 된다.
실패를 회계하는 기록부
실패가 자산이 되려면 감상문이 아니라 회계 시스템이 필요하다. 검증 보고서 한 건은 실패 자산 기록부의 한 엔트리가 되며, 표준 포맷으로 기록돼 학기마다 누적되고 검색·재사용 가능해야 한다.
기록이 쌓이면 학생은 시장 접촉 N회, 유상 전환 M건, 기각 가설 K개를 담은 ‘검증 이력서’를 갖게 된다. 신입 채용이 줄어드는 시대에 기업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은 학점보다 이미 시장에서 부딪혀 본 사람이라는 증거다. 전교생의 기록은 지역 시장에서 무엇이 팔리고 팔리지 않았는지 보여주는, 다른 대학이 복제하기 어려운 데이터베이스가 될 수 있다.
판매 인프라와 안전장치
대학은 학생이 시장을 시험할 수 있도록 채널 키트, 결제 샌드박스, 소액 실험 예산, 시장 코치 멘토 풀을 제공해야 한다. 채널 키트에는 스마트스토어·크라우드펀딩·프리랜서 플랫폼·앱스토어·교내 및 지역 축제 팝업의 개설 가이드와 템플릿이 포함된다. 결제 샌드박스는 협동조합 또는 산학협력단 명의의 공동 판매 계정으로, 사업자 등록 전 학생도 합법적으로 유상 전환을 시험할 수 있게 하는 우산 구조다.
팀당 10만~30만 원 수준의 광고·재료비는 교육 프로그램 예산으로 편성할 수 있다. 교수에게 판매 전문가가 되라고 요구하는 대신, 교수는 가설 설계와 검증 보고서의 엄밀성을 지도하고 지역 소상공인·창업 선배·산학 네트워크가 시장 코칭을 맡는 분업 구조를 만든다.
가드레일도 먼저 정리해야 한다. 수익 귀속과 세무 신고, 미성년자·유학생 사례에 관한 표준 규정을 산학협력단과 세무 자문을 통해 마련한다. 환불 정책, 과장 광고 금지, 개인정보 최소 수집 등 소비자 보호 규정을 교육에 포함하고, 식품·의료·금융 같은 인허가 영역은 모의 판매 또는 인가 파트너를 통한 검증으로 제한한다. 판매 로그는 플랫폼 화면과 타임스탬프로 증빙하며, 지인 구매 배제와 팀 내 개별 회고 평가 원칙을 명시한다.
전공이 달라도 같은 구조
MBL이 공학이나 경영의 전유물이 되면 실패한다. 전공마다 시장과 유상 전환의 형태는 달라도, 실제 딜리버리와 검증이라는 구조는 동일하다. 보건·의료처럼 인허가 제약이 큰 분야에서는 판매 대신 기관의 공식 채택을 전환 신호로 인정할 수 있다.
대학에 ‘졸업 전 실전 N건’ 같은 제도가 있다면 그중 최소 한 건을 판매 검증을 포함한 MBL 사이클로 지정할 수 있다. 기업 발주 경험이 B2B 감각을 준다면, MBL은 B2C 시장 감각을 보완한다. 졸업생은 발주받는 법과 파는 법을 모두 경험하게 된다.
상업화 우려에 대한 답
대학 교육의 상업화라는 우려에 대한 답은 돈벌이가 목적이 아니라 피드백의 진실성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지갑은 가장 정직한 심사위원일 뿐이며, 루브릭은 매출이 아니라 검증의 품질에 점수를 준다. 실패를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검증 가능한 도전을 장려한다. 설계 없는 시도는 실패해도 성공해도 낮은 점수를 받는다.
시장 반응에 운이 개입된다는 비판에도, MBL은 성공 자체를 채점하지 않는다. 접촉·딜리버리·수집·정리처럼 학생이 통제할 수 있는 행동만 평가하므로 심사위원 취향에 좌우되는 발표장 심사보다 공정할 수 있다. 지역 시장이 작다는 지적에는 온라인의 전국·세계 시장과 저비용 오프라인 실험이 가능한 지역의 장점을 함께 활용할 수 있다고 답한다.
기존 PBL이나 캡스톤과 이름만 다른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종점과 채점표가 다르다고 답한다. 발표로 끝나고 결과물을 채점하면 PBL이고, 시장 접촉으로 끝나며 검증을 채점하면 MBL이다. 기존 과목을 폐지할 필요 없이 종점과 루브릭만 바꾸면 되므로 도입 비용도 낮다.
지역 문제를 시장으로 연결하는 로컬솔브
MBL이 매 학기 작동하려면 실제 문제의 안정적 공급이 필요하다. 가칭 ‘로컬솔브(LocalSolve)’는 지역 기업·소상공인·기관이 현장 문제를 등록하면 학생 팀이 CBL(Challenge-Based Learning) 방식으로 수행하고 실제 딜리버리까지 완료하는 문제 마켓플레이스다. 이는 사람을 올리는 구인구직 플랫폼이 아니라 문제를 올리는 플랫폼이다.
운영의 핵심은 문제 품질이다. 모호한 문제는 반려하거나 재정의해야 하며, 보상은 무보상 교육·실비·소액 사례비·채택 시 후속 계약 등 다층으로 설계할 수 있다. 핵심 통화는 대금만이 아니라 ‘채택 확인’이라는 검증 신호다. 기각된 산출물도 왜 작동하지 않는지 정리한 검증 보고서와 함께 발주처에 전달한다. 실패 역시 딜리버리다.
PBL 다음의 교육
발표로 끝나면 PBL이고, 시장으로 끝나면 MBL이다. 기존 캡스톤을 없앨 필요는 없다. 종점과 루브릭을 교체하면 전환할 수 있다.
만들기가 디폴트가 된 시대, 교육이 훈련하고 평가해야 할 것은 파는 힘과 실패를 자산으로 바꾸는 힘이다.
많은 기업의 AX가 실패하는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AI부터 얹기 때문이다. 전사에 AI 도구를 배포하거나 특정 업무용 AI 솔루션을 개발·제공하는 것으로 AX를 마쳤다고 여기지만, 기반이 되는 업무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AI를 올리면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다.
AI를 제공하는 것과, 조직이 AI로 일하게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개인의 AI 활용과 기업의 AX도 다르다. 개인은 오늘 배운 것을 내일 바로 쓸 수 있지만, 기업에서는 수많은 사람의 업무가 얽혀 있어 도구 하나만으로 일하는 방식이 바뀌지 않는다.
도입은 많지만, 성공은 드물다
대부분의 기업은 이미 AI를 도입하거나 실험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성과로 이어진 사례는 많지 않다. 핵심은 AI를 썼는지가 아니라 일하는 방식을 바꿨는지에 있다.
수치는 McKinsey·MIT·S&P Global 등의 2025년 발표 자료를 기준으로 하며, 조사와 연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실패의 공통 원인
실패하는 AX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업무를 표준화하지 않은 채 AI부터 도입하고, 파일럿이 실서비스로 넘어가지 못한 채 멈춘다. 반복 업무가 아니라 거창한 과제부터 시도하며, 성공 사례와 변화관리가 없어 조직 전체로 확산되지 못한다.
AX는 순서의 문제다
무엇을 도입하느냐보다 어떤 순서로 도입하느냐가 성패를 가른다. 효과는 다음 순서를 지킬 때 비로소 쌓인다.
왜 업무 표준화가 먼저인가
표준화되지 않은 업무에 AI를 얹으면 혼란만 커진다. 같은 일을 사람마다 다르게 하는 상황에서 자동화를 올리면, 무엇을 자동화했는지와 결과가 맞는지를 확인할 기준 자체가 없다.
업무를 먼저 표준화하면 무엇이 반복되는지 보이고, AI가 대신할 수 있는 지점이 드러나며, 적용 후 성과를 비교할 기준도 생긴다.
표준화는 AI를 위한 사전 작업이 아니라, AX가 성립하기 위한 전제다.
‘거창함’이 아니라 ‘반복’에서 시작하라
AX를 대단한 혁신으로만 접근하면 시작조차 어려워진다. 가장 큰 효과는 오히려 반복 업무에서 나온다. 매일·매주 반복되는 규칙적인 일은 AI 적용 효과가 즉시 크고, 제대로 됐는지 바로 검증할 수 있으며, 리스크도 낮다.
거창한 목표 대신 확실한 반복부터 처리하면 조직은 AX가 실제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 그 확인이 다음 단계를 여는 열쇠다.
‘기준’이 없으면 AX도 없다
AX에는 반드시 기준이 있어야 한다. 기준이 있어야 생산성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어떤 업무를 AI로 대체할 수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하지만 매번 다르게 처리되는 비정형 업무는 원래 얼마나 걸렸는지, 무엇이 올바른 결과인지조차 흐릿하다.
그래서 반복 업무부터 시작해야 한다. 반복 업무는 처리 시간, 빈도, 오류, 산출물이 일정해 확실한 기준선을 세울 수 있으며, AI 적용 전후를 정확히 비교할 수 있다. 기준이 분명하면 AI로 대체 가능한 업무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반복 업무는 가장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일이자, 가장 확실한 ‘기준’을 만들어 주는 일이다.
성공 케이스에서 사람으로 확장하라
AX의 마지막 열쇠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다. 작은 성공을 눈에 보이는 사례로 만들고, 그 사례를 통해 구성원의 신뢰와 참여를 얻어야 한다. 변화관리는 성공 케이스 위에서만 작동한다.
검증된 성공을 하나씩 늘려가며 적용 범위를 확장할 때 AX는 일회성 프로젝트가 아니라 조직의 일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는다. AI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일의 순서를 바꾸는 것—업무 표준화, 반복 업무 선별, AI 적용, 즉시 검증, 성공 케이스, 변화관리—이 순서가 기업 AX를 실제로 작동하게 만든다.
기업의 AI 전환을 멈추게 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지난 1년 동안 기업에서 걸려온 전화의 첫 문장은 거의 같았다. “AI 전환을 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대기업 임원, 직원 열 명 남짓한 SI 회사 대표, 시드니에서 만난 교민 사업주까지 모두 비슷했다.
처음에는 이를 정보 부족의 문제로 읽었다. 진단 프레임, 우선순위 매트릭스, 90일 로드맵을 만들었다. 그러나 자료를 모두 건넨 뒤에도 같은 자리에서 멈추는 조직이 있었다. 부족했던 것은 지식이 아니라, 첫발을 뗄 때 옆에 있어줄 사람이었다.
부족했던 건 지식이 아니라, 첫발을 뗄 때 옆에 있어줄 사람이었다.
팔란티어가 발명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자리였다
팔란티어의 FDE(Forward Deployed Engineer)는 최고 엔지니어를 고객사 사무실에 직접 앉히는 방식이다. 제품만 납품하는 대신, 사람이 고객의 실제 업무 흐름을 옆에서 보고 며칠에서 몇 주 안에 작동하는 결과를 만든다.
겉으로 보면 오래된 인력 파견의 다른 이름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FDE가 해결한 문제는 인력 공급이 아니었다. ‘지금 있는 곳’과 ‘가고 싶은 곳’ 사이의 거리를 물리적으로 좁히는 일이었다. 사람은 자신의 현재 위치와 목표를 알아도 그 사이를 혼자 건너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팔란티어는 그 사이에 사람을 하나 놓았고, 그것이 작동했다.
숫자가 보여주는 AI 전환의 정체
기업 AI의 실패는 예외가 아니라 다수의 현실이다. MIT와 PwC의 조사 결과는 기술 자체보다 도입 방식과 조직의 실행 조건이 성과를 가른다는 점을 보여준다.
MIT의 Project NANDA는 300건 이상의 기업 AI 배포 사례를 분석해, 실질 손익 효과를 만든 사례가 5%에 그쳤다고 밝혔다. 원인은 모델 품질이나 규제가 아니라 접근 방식이었다. PwC 조사에서도 95개국 CEO 4,454명 중 56%가 AI 투자로 매출 증가도 비용 절감도 얻지 못했다고 답했고, 둘 다 얻은 비율은 12%였다. 책임 있는 AI 체계와 전사 통합이 가능한 기술 환경을 갖춘 기업은 의미 있는 재무 성과를 보고할 확률이 세 배 높았다.
MIT 보고서에서도 외부 전문 파트너와 함께 도입한 경우가 내부에서만 만든 경우보다 훨씬 높은 성공률을 보였다. 실패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었고, 성공한 소수는 대체로 외부에서 사람을 데려온 쪽이었다.
격차는 기술에 있지 않다
기업 AX 프로젝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꿀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업무를 모두 꺼내 보이게 하고, 업무 지도를 그리며, 우선순위를 숫자로 뽑는다. 그러나 최근 1년 동안 배운 것은 보인다고 해서 조직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업무 지도와 우선순위가 있어도 손을 대지 못하는 조직이 있다. 예산이나 인력 문제가 아닌 경우, 대화를 이어가면 결국 책임에 대한 두려움, 직원 반발에 대한 우려, 자신이 잘 모르는 일을 지시해야 한다는 난처함이 드러난다. 병목은 모델, 에이전트, 토큰 비용이 아니다. 사람이 AI를 자기 조직에 흡수하는 속도다.
기술 문제가 아니다. 두려움이다. 불확실성이다.
그래서 FDX다
FDE는 현장에 앉아 실제 워크플로를 보며 기술 격차를 몸으로 메웠다. 하지만 뛰어난 엔지니어들은 대개 실무팀 옆에는 앉아도 의사결정권자인 경영진 옆에는 앉지 않는다. AI 도입의 가장 강력한 선행 지표는 CEO 본인이 AI를 실제로 쓰고 있는가다. 위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래에서 만든 성과는 확산되지 못하고 파일럿 하나로 끝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FDX(Forward Deployed Executive)다. 조직 안에 AI 챔피언이 없다면, 외부에서 경영진 옆자리에 앉을 사람을 데려오는 방식이다. 이 역할은 경영자와 함께 프롬프트를 써보고, 함께 실패하고, 다시 해보며 “이거 해도 됩니다, 제가 옆에 있습니다”라고 말해준다.
“당신은 그냥 제 안심 담요예요. 곁에 있어주세요.”
컨설턴트는 보고서를 남기고, FDX는 습관을 남긴다
차이는 결과물이 아니라 남는 것에 있다. 컨설팅 프로젝트가 끝나면 보고서가 남는다. 잘 만든 보고서는 가치가 있지만, 조직의 손이 바뀌지 않으면 서랍으로 들어간다. FDX의 목표는 혼자 할 수 있게 만든 뒤 빠지는 것이다.
특히 DWY 단계가 가장 어렵고, 많은 프로젝트가 여기서 실패한다. 곁에 앉은 사람이 없으면 사람은 자신이 못 하는 일 앞에서 자리를 떠난다. 보고서를 남기는 일과 습관을 남기는 일의 난이도는 다르며, 후자는 현장에 함께 앉아 있는 시간 없이는 불가능하다.
FDX의 조건: 솔루션 아키텍트의 진화형
10년 전 가장 비싼 인재는 기술의 아키텍처, 관리의 비용·일정·팀, 사업의 ROI·시장을 동시에 아는 솔루션 아키텍트였다. 서로 다른 세 언어를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2026년의 FDX는 여기에 적응력, AI-first 사고, 그리고 실제로 만들어낼 수 있는 손을 더해야 한다.
적응력은 6개월 전의 방법론을 오늘 버릴 수 있는 능력이다. AI-first 사고는 도구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보자마자 사람이 할 일과 AI에 넘길 일을 가르는 감각이다. 만들어낼 수 있는 손은 대신 만들고, 함께 만들고, 결국 상대가 혼자 만들게 하는 능력이다. 만들지 못하는 사람은 조언밖에 할 수 없고, 조언은 이미 충분히 넘친다.
여기에 현장에 앉아 있어 본 시간이 더해진다. 개발자, PM, ERP 컨설턴트로 40개가 넘는 글로벌 기업 구축 프로젝트를 거치며 얻는 것은 단순한 기술 지식이 아니라 조직이 어디서 어떻게 무너지는지에 대한 감각이다. 예컨대 임원의 “그건 좀 어렵겠는데요”가 기술적 반대인지 정치적 반대인지 구분하는 능력이다.
FDX가 파는 것은 정보가 아니라 동석이다
현장의 신뢰, 함께 실패해본 경험, 한 회사의 사정을 아는 맥락은 복제하거나 생성할 수 없는 ‘합성 불가능한 자산’이다. FDX가 파는 것도 정보가 아니다. 정보는 이미 공짜다. FDX가 파는 것은 동석, 즉 함께 자리에 있는 일이다.
AI는 세상의 거의 모든 답을 알고 있지만, 겁먹은 임원에게 안심을 주는 존재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두려움은 정보의 부재가 아니라 관계의 부재에서 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일은 시간을 파는 일이 아니라, 넘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넘어가게 만드는 일이다.
조직이 없어서 가능한 일, 그리고 남은 옆자리의 격차
FDX는 큰 조직이 하기 어려운 일이다. 대형 컨설팅펌에는 경영자 한 명 옆에 몇 달씩 앉아 있는 일을 팔 수 있는 단위로 만들기 어렵고, 파트너급 인력이 직접 붙기에도 그들의 시간은 다른 곳에 팔려 있다. 반면 개인은 결재 없이 움직이고, 오늘 배운 것을 내일 적용하며, 한 사람에게 깊게 붙을 수 있다. 조직이 없어서 오히려 가능한 일이다.
AI는 개인이 조직을 흉내 낼 수 있게 만들었지만, 더 중요한 변화는 조직이 흉내 낼 수 없는 자리를 개인에게 열어준 데 있다. 미국 기업들이 AI에 수천억 달러를 쏟아붓고도 90% 이상이 회수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나쁜 뉴스이면서 동시에 기회의 신호다. 격차가 크다는 것은 그 격차를 메우는 사람의 값이 비싸다는 뜻이다.
기술의 격차는 이미 좁혀졌다. 남은 건 옆자리의 격차다.
기술도, 도구도, 방법론도 넘친다. 부족한 것은 경영자 옆자리에 앉아 “해도 됩니다, 제가 같이 하겠습니다”라고 말해줄 사람이다. 지금 시장에 없는 것은 AI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AI를 아는 사람 옆에 앉아 있어 줄 사람이다.
AI는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것은 동시에 ‘누구도 서로를 고용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다. 개인의 생산 능력은 폭발했는데, 개인의 수입은 왜 줄어드는가.
개발 외주를 맡길 필요가 없다. 바이브코딩으로 며칠이면 SaaS가 나오고, 마케팅 카피·디자인 시안·시장조사·1차 컨설팅도 AI가 대신한다. 개인이 쓰는 비용은 확실히 줄었다. 그러나 그 ‘아낀 비용’은 누군가의 매출이었다.
AI가 준 것은 무한한 기회가 아니라, 서로를 고용할 이유의 소멸이다.
개발자에게 맡기던 외주, 컨설턴트에게 사던 리포트, 디자이너에게 의뢰하던 시안은 솔로프리너·프리랜서·1인 기업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AI는 ‘남이 나를 고용하는 관계’를 하나씩 지우고 있다. 공급 능력은 폭발하고 수요는 증발한다.
숫자로 보는 현실
한쪽에는 ‘1인 유니콘’의 환상이, 다른 쪽에는 무너지는 구인과 단가가 있다. 같은 기술이 만든 두 얼굴이다. 수치는 조사·플랫폼·연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능력은 폭발하고, 수요는 증발한다
AI 담론은 언제나 공급 쪽만 이야기한다. 이제 혼자서 앱을 만들고, 카피를 쓰고, 영상을 편집하고, 재무모델을 돌린다. 전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말은 나에게만 참인 게 아니다. 나에게 일을 주던 사람에게도 똑같이 참이다.
내가 AI로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된 만큼, 나의 잠재 고객도 AI로 그 일을 스스로 하게 됐다. 능력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배분되자 ‘나만 할 수 있는 일’은 줄었다. 할 수 있는 사람은 넘치고, 굳이 남을 고용할 이유는 사라진다.
AI는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 ‘누구도 서로를 고용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를 열었다.
외주가 사라진다
외주는 ‘내가 못 하는 일을 남에게 사는 것’이다. 그 전제가 무너지고 있다. 개발 외주는 바이브코딩으로 내부화되고, 컨설팅 리포트와 시장조사는 프롬프트 몇 개로 대체되며, 디자인 시안과 마케팅 카피는 클라이언트가 직접 뽑는다. 못 하던 일이 줄어들수록, 살 이유도 줄어든다.
ChatGPT 등장 이후 8개월 만에 글쓰기 구인은 약 30%, 자동화에 취약한 직무인 글·코딩 전반의 구인은 약 21% 줄었다. AI에 더 노출된 프리랜서는 계약과 수입이 함께 감소했다. 사라지지 않은 일마저 단가가 내려간다. ‘AI로 하면 되는데 왜 그 값을 주느냐’는 협상이 표준이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로프리너의 통장에는 두 가지가 동시에 찍힌다. 지출은 줄었다. 내가 AI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수입도 줄었다. 남이 나를 AI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후자의 낙폭이 더 크다는 것이다.
병목은 만들기가 아니라 닿기다
‘그럼 내 걸 만들면 되지’는 맞는 방향이지만, 여기에는 두 번째 착시가 있다. 만들기가 쉬워졌다는 것은 모두에게 쉬워졌다는 뜻이다. 어제까지 없던 앱과 웹이 매일 쏟아진다. 새 서비스를 시장에 내놓아도 실제 수익까지 도달하는 일은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
병목은 ‘만들 수 있는가’에서 ‘시장에 닿는가’로 이동했다. 만들기가 공짜에 수렴할수록 희소해지는 것은 발견 가능성, 신뢰, 유통이다. 좋은 제품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도달한 제품이 이긴다. 그리고 도달은 만들기보다 훨씬 어렵다.
닿는 방식마저 바뀌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검색창이 아니라 AI에게 묻고, 그 답 안에 인용되지 못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유통은 이제 AI가 나를 답으로 인용하게 만드는 일까지 포함한다.
결과물을 파는 자리에서, 수요를 소유하는 자리로
노동과 결과물을 파는 모델은 AI가 그 값을 0으로 끌어내리는 순간 무너진다. 생존의 축을 공급, 즉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에서 수요, 즉 누가 나를 필요로 하고 나는 누구에게 닿는가로 옮겨야 한다. 네 가지 전환이 필요하다.
첫째, 더 많이 시도하고 그 시도를 반드시 시장까지 내보내야 한다. 만들기 비용이 0에 수렴한 시대에 희소한 것은 완성도가 아니라 시장에 도달한 시도의 수다. 서랍 속의 완벽함보다 세상에 부딪힌 서른 번의 불완전함이 이긴다.
둘째, 누구도 대충 만들지 않을 만큼 뾰족한 시장을 파야 한다. AI가 평균을 무료로 만들면 평균을 파는 사람은 사라진다. 살아남는 것은 특정한 사람의 특정한 고통을 아는 사람이다. 시장이 좁을수록 대체는 어렵다.
셋째, 결과물이 아니라 수요 그 자체—사람, 관심, 신뢰—를 소유해야 한다. 외주는 남의 수요에 얹혀사는 일이었다. 그 수요가 내부화되면 얹힐 자리가 사라진다. 자기 청중과 자기 커뮤니티, 즉 내가 통제하는 수요가 유일하게 복리로 쌓이는 자산이 된다.
넷째, 유통과 신뢰를 나눌 사람들과 협업해야 한다. 혼자 모든 것을 만들 수 있게 된 바로 그 순간, 혼자서는 아무에게도 닿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서로의 청중을 열어주고 보완적 역량을 묶는 협업이 도달을 만드는 새로운 생산수단이다.
혼자 다 되는 시대일수록, 다시 협업이다
가장 반직관적인 결론은 이것이다. AI가 개인을 전능하게 만들수록 협업의 가치는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른다. 개인은 무엇이든 만들 수 있게 됐지만, 수요는 여전히 혼자 만들지 못한다. 도달과 신뢰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생긴다.
솔로프리너의 다음 단계는 ‘더 완벽한 1인’이 아니라 ‘연결된 1인’이다. 서로의 청중을 열어주고, 보완적 역량을 묶고, 함께 신뢰를 쌓는 느슨한 연대.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요의 원천인 커뮤니티가 이 시대의 해자다.
솔로는 ‘혼자 다 한다’가 아니라 ‘고용 관계에 묶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생존은 더 잘 만드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수요를 가진 사람의 것이다. AI는 만들기를 무료로 만들었다. 이제 각자가 증명해야 할 것은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니라 ‘누가 나를 필요로 하는가’다. 더 많이 시도하고, 시장까지 내보내고, 뾰족한 곳을 파고, 커뮤니티를 짓고, 서로 손을 잡는 것. 그것이 아무도 서로를 고용하지 않는 시대에 솔로프리너가 사는 법이다.
매거진 구성 중…
페이지 모서리를 드래그하거나 좌우 화살표로 넘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