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은 산업화 이전보다 약 1.55°C 더 따뜻했다. 관측 사상 가장 더운 해이자, 연평균으로 1.5°C를 넘은 첫 해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이것이 곧 파리협정의 장기 목표가 실패했다는 뜻은 아니다. 협정의 목표는 한 해가 아니라 수십 년 단위의 기후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2025년 값은 1.44°C였다. 기후가 식은 것은 아니다. 2023~2025년 3년 평균은 1.48°C로 여전히 기록적인 수준이다. 숫자가 오르내리는 까닭은 무엇을 기준으로 재는지, 누가 어떤 데이터로 계산하는지, 단기 변동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있다.
한 해의 기온은 날씨에 가깝고, 20년의 평균은 기후다. 파리협정은 기후를 약속했다.
숫자로 보는 현실
아래 수치는 모두 산업화 이전인 1850~1900년 평균 대비다. 같은 해라도 기관, 데이터셋, 발표 시점에 따라 값이 조금씩 다르며, 모든 값에는 불확실성 범위가 있다. 자료는 2026년 9월까지 공개된 내용을 기준으로 한다.
기준선: ‘몇 도 올랐나’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
1.5°C는 절대 온도가 아니라 차이다. 파리협정 제2조는 ‘산업화 이전 수준 대비’라고 규정하지만, 전 지구에 온도계가 충분히 설치되기 전의 과거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이에 과학계는 관측이 쓸 만해지는 가장 이른 시기인 1850~1900년 평균을 대리 기준선으로 사용한다.
또 다른 질문은 평균 기간이다. IPCC 제6차 평가보고서는 특정 온난화 수준에 ‘도달했다’고 판정할 때 20년 평균을 쓴다. 20년 평균이 처음 1.5°C를 넘는 구간의 가운데 해가 ‘1.5°C 도달 연도’가 된다. 개별 연도의 초과는 그 수준에 도달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방식은 현재를 판정하려면 뒤의 10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한계를 낳는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통계, 물리 모델, AI를 활용해 ‘지금의 장기 수준’을 앞당겨 추정한다.
연도와 추세: 같은 ‘지금’을 말하는 세 숫자
한 해 값, 평균 기간을 늘린 값, 장기 온난화 수준 추정치는 모두 공식 발표 수치다. 어느 하나가 틀린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질문에 답한다. 연간 값은 엘니뇨와 라니냐 같은 자연 변동을 그대로 반영해 크게 출렁인다.
여러 개의 체온계: 하나의 지구, 다른 데이터셋
WMO의 2024년 1.55°C는 한 기관의 측정치가 아니다. 여러 독립 기관의 전 지구 기온 데이터셋을 합친 값이다. 2024년 발표에는 ECMWF, 일본기상청, NASA, NOAA, 영국 기상청·이스트앵글리아대의 HadCRUT, Berkeley Earth 등 6개가 쓰였고, 2025년 발표에는 중국의 CMST와 DCENT가 더해져 8개가 사용됐다.
육지 관측소, 선박과 부이의 해수면 온도, 최근의 위성 자료가 공통 재료다. 차이는 관측이 없는 북극해 등을 비워 두는지, 통계적으로 채우는지, 물리 모델로 추정하는지에 있다. 이 선택에 따라 같은 해의 값도 0.1°C 이상 달라질 수 있다.
2024년에는 모든 데이터셋이 역대 최고라는 데 동의했지만, 1.5°C를 넘었는지에는 갈렸다. NASA와 NOAA만 1.5°C 아래였다. 과학의 신뢰는 하나의 완벽한 측정이 아니라 서로 다른 방법이 같은 방향을 가리킬 때 생긴다.
신호와 소음: 엘니뇨는 파도, 온난화는 밀물
지구 평균기온에는 온실가스가 만드는 꾸준한 상승 위로 엘니뇨·라니냐, 화산 폭발, 태양 활동 같은 단기 변동이 얹힌다. WMO는 2023년 중반부터 2024년 5월까지 이어진 엘니뇨가 2024년의 단기 급등에 기여했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2025년은 라니냐로 시작해 라니냐로 끝났지만 세 번째로 더운 해였다. Copernicus는 이를 관측 사상 가장 더운 라니냐 해로 기록했다. 파도가 낮은 해에도 물높이가 높다는 사실이야말로 밀물이 들어오고 있다는 증거다.
1.55°C는 경고였고, 1.44°C는 안도할 이유가 아니었다. 두 숫자 모두 같은 밀물 위의 파도다.
Forster 외의 2025년 지표 보고에 따르면 인간이 일으킨 온난화는 최근 10년간 10년에 약 0.27°C씩 상승하고 있다. 사상 최고 수준의 온실가스 배출과 더불어, 에어로졸의 냉각 효과가 줄어든 것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대기오염이 줄어드는 긍정적 변화가 그동안 가려져 있던 온난화를 드러내는 역설이다.
측정의 사슬에서 AI가 하는 네 가지 일
‘AI가 기후를 측정한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온도계, 부이, 위성이 측정한다. AI는 이 측정값들이 전 지구 평균이라는 하나의 수치가 되는 과정에서 빈칸을 채우고, 계산을 빠르게 하며, 패턴을 찾는다.
첫째는 관측 공백 보간이다. 19세기 바다와 극지, 오늘날의 아프리카 내륙과 남극 일부에는 관측소가 드물다. 전통적으로 크리깅과 가우시안 과정 같은 통계 보간을 썼고, 최근에는 이미지 복원용 딥러닝도 활용된다. Kadow 외는 2020년 이미지 복원 신경망으로 HadCRUT4의 빈칸을 재구성했으며, 1850~2018년 온난화 추세가 기존 추정보다 더 강하게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둘째는 재분석이다. 재분석은 물리 기반 예보 모델에 위성, 라디오존데, 지상관측, 항공기, 부이 자료를 계속 흡수하는 데이터 동화를 통해 과거 날씨를 다시 예보하는 작업이다. ERA5는 하이브리드 4D-Var 동화로 1940년부터 현재까지 시간 단위, 약 31km 해상도의 전 지구 기록을 제공하며 WMO 연례 발표에 쓰이는 데이터셋 중 하나다.
셋째는 재분석 자료를 학습한 AI 기상 예측 모델이다. 이 모델들은 물리 방정식을 직접 풀지 않고 과거 대기 상태의 변화 패턴을 학습해 며칠 뒤를 예측한다. GraphCast는 2023년 발표에서 10일 예보를 1분 안에 내고 1,380개 검증 지표의 90%에서 기존 최고 결정론적 예보를 앞섰다. ECMWF는 2025년 2월 25일 AIFS를 기존 물리 모델과 나란히 정식 운영에 투입했다.
넷째는 신호와 소음을 가르는 장기 수준 추정이다. 과거 20년 평균은 10년 늦게 답하고, 한 해 값은 너무 크게 출렁인다. 이에 과학자들은 엘니뇨, 화산, 태양 변동을 걸러내거나 온실가스와 에어로졸의 원인별 기여를 계산한다. 주력은 여전히 통계·물리 기반 방법이며, 기계학습은 패턴 탐지와 보조 추정에서 역할을 넓히고 있다. Forster 외의 연례 보고는 2025년 인간 유발 온난화를 1.37°C로 추정했고, 현재 추세라면 2030년 무렵 1.5°C에 이를 것으로 봤다.
정직한 한계와 앞으로의 전망
AI는 관측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보간된 값은 주변 관측과 학습 데이터에 기반한 추정일 뿐이며, 관측소가 사라지면 AI의 근거도 약해진다. 관측망 유지는 AI 시대에 오히려 더 중요하다.
기계학습은 본 적 있는 패턴에 강하지만, 온난화는 정의상 과거에 없던 상태로 가는 과정이다. 학습 범위를 벗어난 극한에서는 물리 법칙에 기반한 모델의 검증이 여전히 필요하다. 또한 ‘1.5°C에 도달했다’는 판정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IPCC와 WMO 같은 과학계의 합의 절차가 내린다. AI는 판단의 재료를 더 빠르고 촘촘하게 제공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 넘느냐’만이 아니라 얼마나 넘고 얼마나 빨리 되돌리느냐다. AI는 밀물을 더 빠르고 촘촘히 보여 주는 도구가 될 수 있지만, 물높이를 바꾸는 것은 결국 배출을 줄이는 사람들의 결정이다. 측정이 정확해질수록 핑계는 줄어든다.
0.5°C는 작아 보인다. 아침 기온이 21.5°C인지 22°C인지 구별하기는 어렵고, 옷차림이나 기분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1.5°C와 2°C의 차이는 협상장의 소수점 싸움처럼 들리기 쉽다.
그러나 이 수치는 오늘의 날씨가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지구 전체 평균이다. 평균이 0.5°C 오르면 가장 뜨거운 날, 가장 긴 가뭄, 가장 취약한 생태계가 있는 분포의 꼬리는 훨씬 크게 움직인다. 2018년 10월 인천에서 승인된 IPCC 1.5°C 특별보고서(SR1.5)는 이 차이를 수치로 종합했다. 이제 AI는 그 수치를 ‘내 지역’의 언어로 옮기려 한다.
0.5°C는 작아 보인다. 그래서 위험하다.
숫자로 보는 현재
WMO 수치는 여러 데이터셋을 통합한 값으로 ±0.13°C의 불확실성이 있다. 산호초 84%는 백화 수준 열 스트레스를 받은 면적이며 폐사율이 아니다. 조사 시점과 방법에 따라 수치는 달라질 수 있다.
1.5°C는 안전선이 아니다
2015년 12월 채택된 파리협정은 산업화 이전, 통상 1850~1900년 평균 대비 온도 상승을 2°C보다 ‘훨씬 낮게’ 유지하고 1.5°C로 제한하도록 ‘노력’한다고 명시한다. 1.5°C는 더 야심 찬 목표이지, 그 아래라면 안전하다는 경계선이 아니다.
WMO가 2024년 평균기온을 산업화 이전 대비 약 1.55°C로 집계했다고 해서 파리 목표가 한 해 만에 판정되는 것은 아니다. 목표는 수십 년 평균에 관한 것이다. 다만 2023~2025년 평균이 1.48°C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장기 평균이 그 선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경고한다. 1.5°C에서도 열대 산호초의 70~90%가 추가로 감소한다. 피해를 없애는 목표가 아니라 줄이는 목표인 것이다.
1.6°C는 1.7°C보다, 1.7°C는 2°C보다 낫다.
반 도가 두 배, 세 배가 되는 장부
IPCC SR1.5 정책결정자 요약본과 3장에서 1.5°C와 2°C를 직접 비교한 지표들이다. 수치는 두 온난화 수준 사이를 임의로 보간하지 않은 원문 값이다. 지표마다 근거 연구, 확신도, 가정이 달라 합산하거나 단순 비교할 수 없다.
해수면의 ‘약 10cm’는 0.1m(0.04~0.16m)라는 범위를 가진 중간 확신도 수치다. 옅은 막대 구간으로 제시되는 범위와 확신도를 떼어내면, 과학의 수치는 구호가 된다.
평균은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다
숫자가 멀게 느껴지는 데에는 구조적 이유가 있다. 첫째, 평균은 극값을 숨긴다. SR1.5에 따르면 지구 평균이 1.5°C 오를 때 중위도 극한 고온일은 최대 약 3°C, 2°C일 때는 약 4°C 더 뜨거워진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평균이 아니라 그 꼬리다.
둘째, 피해는 선형이 아니다. 산호는 일정 수온까지 버티지만 문턱을 넘으면 한꺼번에 백화한다. 70~90%와 99% 이상의 차이는 ‘조금 더 나쁨’이 아니라 일부라도 남는가, 거의 모두 사라지는가의 차이다. 셋째, 세계 인구 13.8%와 36.9%라는 숫자는 내 도시와 우리 동네 여름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기후 위기의 커뮤니케이션 문제는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정보가 ‘내 주소’를 갖고 있지 않아서 생긴다.
무거운 모델을 흉내 내는 가벼운 모델
SR1.5의 수치는 대기·해양·빙하·탄소순환의 물리 방정식을 격자 위에서 푸는 지구시스템모델(ESM)과 그 결과를 해석한 연구들에서 나왔다. ESM은 정교하지만 슈퍼컴퓨터에서 하나의 시나리오를 돌리는 데 수주에서 수개월이 걸린다. 그래서 세계는 SSP1-2.6, SSP2-4.5 같은 소수의 표준 시나리오에 계산을 집중해 왔다.
ClimateBench(2022)은 배출 시나리오에서 기온·일교차·강수·극한 강수의 전 지구 분포를 맞히는 에뮬레이터의 비교 기준을 만들었다. Ai2의 ACE2는 약 4억 5천만 파라미터로 6시간 간격, 1° 해상도에서 질량과 수분을 보존한다. Google의 NeuralGCM은 대규모 역학은 물리 방정식으로 풀고 구름 같은 소규모 과정에 신경망을 쓰는 하이브리드 모델이다. NVIDIA의 Earth-2와 cBottle도 이 흐름에 속한다. 이 도구들은 연구·개발 단계이며 IPCC 평가의 공식 근거를 대체하지 않는다.
전 지구 격자를 우리 동네로 좁히기
전 지구 모델의 격자는 보통 수십에서 100km 단위여서 한 칸에 산과 바다, 도시와 논이 함께 들어간다. 이를 더 작은 격자로 쪼개는 작업이 상세화다. 지역 기후 모델로 물리를 다시 푸는 역학적 상세화와, 관측 및 모델 간 통계 관계를 쓰는 통계적 상세화가 대표적이다.
한국 기상청 기후정보포털은 SSP 시나리오 기반 ‘남한상세 기후전망(1km)’을 제공한다. 기온·강수와 27개 극한기후지수를 2100년까지 제시하고 시군구 단위 집계도 제공한다. 지형을 반영하는 한국형 PRISM과 분위수 보정(QDM) 같은 통계 기법이 활용된다. ‘내 지역’ 전망은 AI 이전부터 통계로 만들어져 왔다.
AI가 더하는 것은 속도와 분포다. NVIDIA의 CorrDiff는 25km 대기 상태를 2km로 내려 그리는 생성형 확산 모델로, 대만 주변에서 학습돼 2025년 학술지에 발표됐다. 하나의 선명한 답 대신 가능한 세부 패턴들의 확률 분포를 만든다는 점이 특징이다. 다만 주로 날씨 규모에서 검증된 기술이므로, 수십 년 기후 전망에 그대로 적용하려면 별도의 검증이 필요하다.
이 흐름은 이해를 위한 가상 예시이며, 특정 기관의 실제 업무 절차나 결과가 아니다.
선명한 지도일수록 한 번 더 의심하라
에뮬레이터는 ESM이나 재분석 자료라는 ‘선생님’을 흉내 낸다. 원래 모델이 몬순을 약하게 그렸다면 에뮬레이터도 그 편향을 상속한다. 빠르다는 것은 더 정확하다는 뜻이 아니다. 더욱이 우리가 알고 싶은 2°C 세계는 아직 관측된 적 없는 영역이며, 과거 기후로 학습한 모델의 외삽 능력은 여전히 연구 과제다.
1km 격자 지도도 1km 단위로 정확하다는 뜻은 아니다. 거친 원래 모델의 불확실성은 상세화 과정에서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선명한 이미지 뒤에 숨을 수 있다. 그렇다고 도구를 버릴 이유는 없다. 에뮬레이터와 AI 상세화의 가치는 정답을 주는 데 아니라, 1.5°C와 2°C 사이의 많은 경로와 각 경로의 불확실성 분포를 더 싸게, 더 많이 탐색하게 하는 데 있다.
그 결과를 ‘예언’으로 읽지 않고 ‘조건부 전망’으로 읽는 태도만 지킨다면.
AI 기후 지도를 읽는 다섯 가지 질문
앞으로 ‘AI가 예측한 2050년 우리 동네’ 같은 지도는 더 자주, 더 그럴듯하게 등장할 것이다. 공유하거나 의사결정에 사용하기 전, 다음을 확인해야 한다.
0.5°C는 소수점이 아니다. 누군가의 산호초이고, 누군가의 여름이다. AI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이 차이를 더 크게 외치는 것이 아니라 더 가깝게 보여주는 것이다. 전 지구 평균을 내 도시의 여름으로, 하나의 숫자를 정직한 범위로 번역하는 일이다.
파리협정의 심장은 국가결정기여(NDC)다. 교토의정서처럼 위에서 감축량을 배분하는 대신, 모든 나라가 참여하는 대가로 무엇을 얼마나 줄일지는 각국이 스스로 정한다. 이 설계는 190여 개 당사국을 한 테이블에 앉힌 비결이자 가장 큰 약점이기도 하다.
스스로 정한 약속을 지키게 하는 장치는 벌금이 아니라 투명성이다. 무엇을 약속했고 얼마나 했는지를 공개하고 서로 들여다보게 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투명성은 오랫동안 정부의 자기 신고에 의존해 왔다. 이제 위성은 궤도에서 메탄 기둥을 찾고, 기계학습은 발전소의 열과 연기를 읽어 시설별 배출을 추정하며, 언어 모델은 수백 쪽의 NDC를 비교한다.
AI는 심판이 아니다. 각국이 자기 신고를 비춰 볼 수 있는, 처음으로 생긴 두 번째 거울이다.
숫자로 보는 현실
수치는 UNEP·UNFCCC·IEA 공개 자료에 따른다. 보고서마다 대상 국가, 가스, 토지이용 포함 여부와 방법론이 달라 수치를 직접 비교할 수 없으며, 조사 시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약속의 구조
파리협정은 법적 구속력이 있는 조약이지만, 각국이 NDC 목표를 달성할 법적 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다. 제4조 2항은 NDC를 준비·제출·유지하고, 목표 달성을 목적으로 국내 감축 조치를 추진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결과의 의무’가 아니라 ‘행위의 의무’다.
대신 협정에는 두 개의 톱니가 있다. 5년마다 이전보다 진전된 NDC를 제출해야 하는 진전 원칙(제4조 3항·9항), 그리고 모든 당사국이 공통 규칙으로 보고·검토받는 강화된 투명성 체계(ETF·제13조)다. 이행·준수 위원회는 촉진적·비대립적·비징벌적으로 운영되며, 제재와 벌금은 없다. 이 체계에서 데이터의 질은 곧 압력의 질이다.
벌칙이 없는 조약에서 유일한 집행 수단은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약속과 필요 사이의 간극
‘NDC는 지켜지고 있는가’에는 두 질문이 겹쳐 있다. 약속 자체가 충분한가라는 야망 간극, 그리고 그 약속을 실제로 이행하는가라는 이행 간극이다. 전자는 문서를 읽으면 알 수 있지만, 후자는 배출을 측정해야 알 수 있다.
UNEP 배출격차보고서 2025에 따르면 2024년 전 지구 온실가스 배출은 전년보다 2.3% 증가한 577억 톤CO₂ 환산으로 사상 최대였다. 2035년 1.5°C 경로에는 2019년 대비 55%, 2°C 경로에는 35% 감축이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NDC를 빠짐없이 이행해도 감축은 약 15%에 그친다.
UNFCCC는 2025년 11월 9일까지 제출된 113개 당사국의 86개 신규 NDC를 반영해 2035년 배출이 약 12% 감소할 것으로 봤다. 파리협정 이전의 증가 전망과 비교하면 분명한 진전이지만, 필요한 거리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UNFCCC 수치와 UNEP 수치는 토지이용 포함 여부와 방법론이 달라 직접 합산·차감할 수 없다.
UNEP는 NDC 기반 온난화 전망이 전년의 2.6~2.8°C에서 2.3~2.5°C로 낮아졌지만, 이 중 0.1°C는 방법론 변경 효과이며 2026년 1월 27일 발효된 미국의 협정 탈퇴가 다시 0.1°C를 상쇄한다고 짚었다.
투명성의 순환과 첫 보고서
파리협정의 점검 체계는 순환한다. NDC를 5년마다 제출하고, 국내 이행을 상시 수행하며, 격년투명성보고서(BTR)를 2년마다 낸다. 이어 기술전문가검토(TER), 다자 촉진 검토(FMCP), 5년마다의 전지구적 이행점검(GST)이 진행되며, GST 결과는 다음 NDC의 출발점이 된다. AI는 이 순환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각 단계에 독립된 두 번째 데이터를 공급한다.
ETF에 따라 BTR은 온실가스 인벤토리와 NDC 진척을 공통 양식으로 보고한다. 첫 제출 기한은 2024년 12월 31일이었다. AI의 역할은 신고치와 독립 관측치를 나란히 놓고 차이가 큰 부문과 지역을 찾는 데 있다. 판결이 아니라 검토를 위한 질문 목록을 만드는 일이다.
2025년 10월 31일 공개된 첫 종합보고서는 ETF가 실제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이정표였다. 동시에 세 가지 한계도 드러냈다. 보고 데이터의 시차, ‘활동량×배출계수’에 의존하는 간접 추계, 그리고 많은 개도국이 겪는 데이터 품질·방법론 역량의 격차다. 느림, 간접성, 불균등이라는 이 틈이 위성과 AI가 들어오는 자리다.
궤도의 눈, 신고치 옆의 관측치
Climate TRACE는 2020년 결성된 비영리 연합으로, 300기 이상 위성과 1만1,000여 개 센서 데이터를 AI와 기계학습으로 분석한다고 밝힌다. 7억4,000만 개 이상의 배출 자산을 추적하며, 2025년부터 약 두 달 지연으로 월간 전 지구 배출 추정치를 내고 있다. 2026년 8월 발표에 따르면 2026년 상반기 전 지구 배출은 전년 동기보다 0.2% 늘었다.
메탄에서는 관측의 효용이 특히 선명하다. 메탄은 특정 파장에서 뚜렷한 흡수 흔적을 남기며, 유전·가스관·매립지의 대형 누출은 사건처럼 드러난다. Sentinel-5P의 TROPOMI는 매일 지구 전체를 훑어 초대형 누출을 찾고, IEA에 따르면 메탄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위성은 25기 이상이다. IEA는 측정 기반 에너지 부문 메탄 추정치가 UNFCCC 신고 합계보다 약 80% 높다고 밝혔다.
UNEP의 MARS는 위성으로 대형 누출을 포착하면 정부와 기업에 알린다. 응답률은 1년 새 약 1%에서 12%로 상승했고, 통보가 실제 누출 차단으로 이어진 사례도 40건을 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보는 여전히 응답을 받지 못한다. 신고는 전체를, 관측은 사건을 본다. 둘은 경쟁자가 아니라 서로의 사각지대를 비추는 한 쌍이다.
문서 읽기와 AI의 한계
위성이 이행 간극을 재는 도구라면, 야망 간극은 문서를 비교해야 드러난다. NDC는 표준 양식이 아니다. 절대량 감축, BAU 대비 감축, GDP당 배출 집약도 목표가 섞이고 기준연도·조건부 여부·산림 및 토지이용 포함 여부도 다르다. 같은 ‘40% 감축’도 전혀 다른 의미일 수 있다.
Climate Policy Radar는 3만 건이 넘는 기후 법률·정책 문서를 검색할 수 있는 공개 데이터베이스를 운영하고, 법률·정책·UNFCCC 제출 문서에서 탄소중립과 감축 같은 정량 목표를 자동으로 찾는 기계학습 분류기를 공개했다. 사람이 수주일 걸려 읽던 비교 작업을 첫 초안 수준에서는 수분으로 줄일 수 있다.
한국은 2025년 11월 2035년 목표를 ‘2018년 대비 53~61% 감축’으로 확정하고 12월 UNFCCC에 제출했다. 하한 53%는 2018년과 2050년 탄소중립을 잇는 직선 경로, 상한 61%는 기술 혁신과 산업 구조 전환을 전제로 한다. 범위 목표를 다른 나라의 단일 수치 목표와 나란히 놓는 일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결정해야 할 해석의 문제다.
감시자의 한계와 숫자를 읽는 법
‘AI 감시자’라는 말은 주권, 데이터 공백, 거짓 정밀도, 정치적 사용을 경계해야 한다. 제3자의 위성 추정치가 공식 인벤토리를 대체하려 하면 국가 참여 자체를 흔들 수 있다. 또 구름이 잦은 베네수엘라나 눈·얼음에 덮인 러시아 북부처럼 위성이 유용한 데이터를 얻기 어려운 곳도 있다. 2024년 3월 발사된 메탄 전용 위성 MethaneSAT는 2025년 6월 20일 교신이 끊겨 1년 남짓 만에 임무를 마쳤다.
시설마다 톤 단위 숫자를 붙인 지도는 강력해 보이지만, 많은 값은 직접 측정이 아니라 모델 추정이다. 오차 범위 없이 유통되면 추정이 사실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무역 분쟁, 국경 탄소 조정, 외교 갈등 속에서 특정 국가를 겨냥한 독립 추정치는 과학이 아니라 무기가 될 수도 있다. 누가 관측하고, 누가 자금을 대며, 방법론이 공개되는지까지 감시받아야 한다.
‘위성이 A국의 축소 신고를 적발했다’는 기사를 만났을 때는 다섯 가지를 확인해야 한다. 같은 가스·부문·연도·경계를 비교했는지, 오차 범위가 제시됐는지, 구름·눈·야간 같은 관측 공백은 없는지, 방법론을 제3자가 재현할 수 있는지, 그리고 숫자가 무역 협상이나 외교 갈등 한복판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다.
정직한 답은 ‘약속 자체가 부족하고, 이행은 아직 제대로 잴 수 없다’에 가깝다.
약속은 여전히 각국이 한다. 달라진 것은 이제 모두가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위성과 AI는 이행에 관한 답을 더 빠르고 촘촘하게 만들지만, 숫자를 판결이 아니라 대화의 재료로 쓰고 부족한 약속을 끌어올리는 일은 여전히 정치와 사람의 몫이다.
파리협정은 5년마다 모두의 진전을 함께 점검한다. 첫 이행점검에는 17만 쪽이 넘는 입력이 쌓였다. 2028년 두 번째 성적표를 앞두고 AI는 그 방대한 기록을 읽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채점과 서명까지 넘길 수는 없다.
약속은 각자 했다. 채점은 함께 한다.
교토의정서처럼 위에서 감축량을 배분하는 대신, 파리협정은 각국이 스스로 목표를 정해 제출하도록 설계됐다. 따라서 제각각의 약속을 합치면 충분한지, 또 그 약속이 지켜지고 있는지라는 질문이 남는다. 협정 제14조의 전 지구적 이행점검(Global Stocktake, GST)은 이 질문에 답하는 장치다. 개별 국가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형평성과 최선의 가용 과학에 비추어 인류 전체가 목표에 얼마나 가까워졌는지를 함께 따진다.
심판이 아니라 톱니바퀴
제14조는 이행점검을 협정의 목적과 장기 목표를 향한 집단적 진전을 평가하는 과정으로 규정한다. 감축·적응·이행수단과 지원을 모두 고려하고, 형평성과 최선의 가용 과학에 비추어 포괄적이고 촉진적인 방식으로 수행한다.
과정은 세 단계다. 먼저 정보 수집과 준비가 있고, 이어 전문가와 당사국이 입력을 놓고 대화하는 기술적 평가가 진행된다. 마지막으로 산출물을 검토해 정치적 메시지와 결정문을 만든다. 앞의 두 단계가 ‘읽기’라면 마지막 단계는 ‘합의’다.
결과는 다음 국가결정기여(NDC)로 이어진다. 점검(2023) → 새 NDC(2025) → 점검(2028) → 새 NDC(2030 예상)로 이어지는 5년 주기는 흔히 ‘야심 상향 메커니즘(ratchet)’이라 불린다. 이행점검은 누구를 처벌하지 않는다. 다음 약속의 기준선을 높인다. 그 힘은 강제가 아니라 모두가 같은 성적표를 본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2015년에서 2028년까지, 한 바퀴 반
두바이가 첫 성적표에 적은 문장들
2023년 12월 COP28에서 채택된 결정문 1/CMA.5는 감축·적응·이행수단 전반에 진전이 있었지만, 당사국들이 아직 집단적으로 궤도 위에 있지 않다고 밝혔다. 1.5°C 제한을 위해서는 2019년 대비 2030년까지 43%, 2035년까지 60%를 감축하고 2050년 CO₂ 넷제로를 달성해야 한다고 적었다.
제28항은 국가별 의무 할당이 아니라 당사국들에 행동을 ‘촉구(calls on)’하는 형식이다. 그럼에도 화석연료를 에너지 전환의 대상으로 이처럼 명시한 것은 기후 협상사에서 처음이었다.
17만 쪽을 누가 다 읽었을까
첫 점검의 기술 대화에는 17만 쪽이 넘는 서면 제출물이 들어왔고, 회의는 252시간 이상 열렸다. 공동 촉진자들과 사무국은 이를 17개 핵심 발견으로 압축했다. 놀라운 작업인 동시에 구조적 한계가 분명한 작업이다.
한 사람이 매일 200쪽을 쉬지 않고 읽어도 단순 계산으로 850일이 걸린다. 실제 과정에서는 분업하고 요약본을 읽으며, 익숙한 언어와 익숙한 기관의 문서에 먼저 손이 간다. 사람의 종합에도 이미 선택과 누락이 들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첫 점검 때 이미 기계가 들어왔다. 한 비영리 연구 조직은 1,600건이 넘는 입력 문서를 전문 검색하고 모든 언어를 영어로 번역하며, 기계학습 분류기로 부문과 정책수단을 태깅한 공개 탐색 도구를 내놓았다. 학계에서는 25만 개가 넘는 문단을 다국어 토픽 모델로 분석한 연구도 나왔다.
질문은 ‘AI를 쓸 것인가’가 아니다. 이미 쓰고 있다. 질문은 ‘어디까지 맡길 것인가’다.
읽기, 재기, 비교하기, 거들기
AI가 이행점검에 보탤 수 있는 역할은 크게 네 가지다. 그러나 각 역할에는 반드시 경고문이 따라붙어야 한다.
두바이가 적은 ‘필요한 감축’과 2025년 새 NDC가 약속한 감축을 나란히 놓으면 격차의 규모가 드러난다. 두 수치는 산출 방법과 범위가 다르므로 정확한 차감이 아니라 비교로 읽어야 한다.
UNEP의 『배출격차보고서 2025』 역시 NDC가 완전히 이행돼도 금세기 온난화가 2.3–2.5°C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AI가 도울 일, 사람이 해야 할 일
경계선은 기술의 성능이 아니라 정당성에서 그어진다. 계산이 끝나는 곳에서 판단이 시작되며, 판단에는 책임질 주체가 있어야 한다.
CBDR-RC는 ‘공통의 그러나 차별화된 책임과 각자의 역량’(Common But Differentiated Responsibilities and Respective Capabilities)을 뜻한다.
요약은 중립적이지 않다
이행점검의 결론은 기술 보고서가 아니라 정치적 합의다. ‘누가 먼저, 얼마나, 누구의 돈으로’라는 질문에는 정답 데이터가 없다. 역사적 배출 책임, 발전의 권리, 취약성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일은 각국 대표가 협상장에서 해야 하며, 그 결과를 자국민에게 설명할 책임도 그들에게 있다.
AI 요약이 이 과정을 대신하는 순간, 합의는 ‘모델이 그렇게 말했다’로 바뀐다.
2028년 전, 두 번째 성적표를 위한 다섯 가지 규칙
두 번째 점검의 정보 수집은 약 6주 뒤 시작된다. 이번에는 생성형 AI가 훨씬 깊숙이 들어올 것이다. 사무국, 당사국 대표단, 시민사회가 AI로 입력을 읽고 요약한다면 최소한 다섯 가지 원칙이 필요하다.
이 규칙은 AI를 막자는 뜻이 아니다. 작은 나라의 한 문단까지 읽히게 하는 일은 사람의 시간이 아니라 기계의 인내심에 달려 있을 수 있다. 다만 그 인내심이 누구의 목소리를 키우고 누구의 목소리를 줄이는지 보여야 한다.
AI는 성적표를 읽는다. 서명은 사람이 한다.
첫 번째 성적표는 ‘궤도에 있지 않다’고 적었다. 두 번째 성적표에 무엇이 적힐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AI는 그 성적표를 더 빠르게, 더 넓게, 더 많은 언어로 읽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숫자를 받아들이고 누구에게 얼마를 요구할지는 끝내 사람의 몫이다. 기계가 잘 읽을수록, 사람은 더 잘 판단해야 한다.
기후 이야기는 대개 얼마나 줄일 것인가로 흐른다. 배출량, 탄소중립, 1.5°C. 그러나 2024년 지구 평균기온은 이미 산업화 이전(1850~1900년)보다 약 1.55°C 높았다. 한 해의 수치가 곧 파리협정 목표의 실패를 뜻하지는 않는다. 목표는 수십 년 평균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숫자는 우리가 이미 바뀐 기후 속에 살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파리협정은 처음부터 두 개의 다리로 서 있었다. 하나는 감축이며, 다른 하나는 적응이다. 감축이 미래의 피해를 줄이는 일이라면, 적응은 이미 피할 수 없게 된 피해 속에서 사람과 생계를 지키는 일이다. 온도를 0.1°C 낮추는 싸움과 오늘 밤 체감온도 38°C 속에서 혼자 사는 노인에게 전화를 거는 일은 모두 기후 정책이다.
협정의 다른 절반
파리협정 7조는 적응 역량을 키우고, 회복력을 강화하며, 취약성을 줄이는 ‘적응에 관한 전지구적 목표(GGA)’를 세웠다. 그러나 감축과 달리 적응에는 톤처럼 통용되는 공통 단위가 없다. 배출량은 더하고 뺄 수 있어도 회복력은 쉽게 합산할 수 없다.
그 목표가 구체적인 숫자를 얻기까지는 8년이 걸렸다. 2023년 COP28은 물·식량·보건·생태계·빈곤과 생계·인프라·문화유산에 관한 주제 목표와 위험평가·계획·이행·모니터링의 단계 목표를 담은 UAE 기후회복력 프레임워크를 채택했다. 2025년 벨렝 COP30에서는 진척을 측정할 자발적 지표 59개가 채택됐다.
적응의 지도, 네 개의 층
적응은 하나의 거대한 사업이 아니라 겹겹의 층이다. 한 사람의 몸, 한 동네의 거리, 한 농가의 밭, 그리고 그 모든 위험의 값을 매기는 금융이 연결된다. 개인의 폭염 위험은 도시의 열섬과 이어지고, 농가의 소득은 금융의 보험과 이어진다.
폭염을 영향으로 번역하다
폭염은 소리 없는 재난이다. 무너지는 건물이나 불어나는 강물 없이, 혼자 사는 노인·야외 노동자·영유아를 먼저 데려간다. 이때 AI의 역할은 단순한 기온 예보를 영향 예보로 바꾸는 데 있다. 체감온도·습도·야간 최저기온을 집단별 위험으로 번역하고, 고령·독거·냉방 여부·소득 같은 사회 데이터와 열 노출을 겹쳐 방문과 연락의 우선순위를 정한다.
한국 기상청은 2019년 6월부터 폭염 영향예보를 정규 서비스로 운영해 왔다. 보건, 산업, 축산업, 농업, 수산양식 분야에 관심·주의·경고·위험의 네 단계를 제시한다. 2026년 여름에는 18년 만에 폭염특보를 개편해, 일최고체감온도 38°C 또는 일최고기온 39°C 이상이 하루만 예상돼도 발표하는 ‘폭염중대경보’를 신설했다.
AI가 바꾸는 것은 해상도와 시점이다. ‘올여름은 덥다’는 ‘이 동네, 이 시간대, 이 사람이 위험하다’로 바뀐다.
그러나 취약계층 데이터는 민감한 개인정보이기도 하다. 누가 혼자 사는지, 누가 에어컨을 갖췄는지 아는 시스템은 보호에도 감시에도 쓰일 수 있다. 또한 쿨루프를 설치할 예산, 파종을 미뤄도 버틸 저축, 경보를 듣고 갈 수 있는 대피소는 모델이 아니라 재원과 제도가 만든다.
경보는 네 개의 기둥 위에 선다
조기경보는 가장 비용 대비 효과가 큰 적응 수단 가운데 하나다. UN에 따르면 폭풍이나 폭염을 24시간 전에만 알려도 피해를 최대 30%까지 줄일 수 있으며, 조기경보 체계를 잘 갖춘 나라의 재난 사망률은 그렇지 않은 나라보다 최소 6배 낮다. 2022년부터 2026년까지 다중재해 조기경보 체계를 갖췄다고 보고한 국가는 113개국에서 136개국으로 늘었다. 그러나 2025년 기준 군소도서개발국에서 체계를 갖춘 곳은 43%에 그쳤다.
예측이 있어도, 가장 약한 고리가 남는다
관측과 예측의 영역에서 AI는 이미 판을 바꾸고 있다. Google의 AI 홍수 예보는 하천 홍수를 최대 7일 앞서, 도시 돌발홍수는 최대 24시간 앞서 내다보며, 약 150개국에서 약 20억 명이 사는 지역을 포괄한다고 밝힌다. 관측소가 없는 하천에도 ‘가상 관측소’를 세우는 방식이다.
경보의 가치는 가장 약한 기둥이 결정한다. 예측이 7일 앞서도 전달이 끊기면 0일이고, 전달이 돼도 갈 곳이 없으면 0일이다.
필요한 돈과 오는 돈 사이
UNEP의 2025년 적응 격차 보고서의 부제는 ‘Running on Empty’, 빈 탱크로 달리다다. 개발도상국이 2035년까지 적응에 필요로 하는 돈은 연간 3,100억~3,650억 달러로 추산된다. 반면 2023년 실제로 흘러간 국제 공공 적응 재원은 약 260억 달러로, 전년 약 280억 달러보다 오히려 줄었다.
COP30 결정문은 2035년까지 적응 재원을 최소 3배로 늘리겠다고 했지만, 기준연도와 금액은 명시하지 않았다. 약 1,200억 달러라는 수치는 COP26의 약 400억 달러 ‘2배’ 목표를 기준으로 한 분석가들의 해석이다. 지금 흐르는 돈은 수요의 12분의 1에서 14분의 1이며, 3배 목표를 달성해도 수요의 3분의 1을 넘지 못한다. 민간 부문이 정책 지원과 혼합금융을 전제로 연간 약 500억 달러를 보탤 수 있다는 전망이 있어도 공백은 크다.
AI는 한정된 돈을 더 정확한 곳에 쓰도록 열지도와 위험 모델로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다. 동시에 적응 사업을 측정 가능하게 만든다. 벨렝 지표 59개가 있어도 데이터가 없으면 진척을 보고할 수 없다. 재원이 성과를 요구하는 한, 측정 능력은 곧 재원 접근성이다.
적응과 기술의 한계
적응은 무한하지 않으며, 기술도 그렇다. IPCC 제6차 평가보고서는 일부 인간 시스템이 재정·제도·정책 제약으로 인한 ‘연성 한계’에 이미 도달했고, 일부 생태계는 더 이상 적응할 수 없는 ‘경성 한계’에 닿았다고 평가했다. 온난화가 진행될수록 한계에 닿는 시스템은 늘어나며, 그 너머는 적응이 아니라 손실과 피해의 영역이다.
손실과 피해 대응 기금은 2025~2026년 첫 시범 창구에 2억5,000만 달러를 배정했다. 연간 수천억 달러에 이르는 적응 재원 수요와 비교하면 상징에 가깝다. 더욱이 IPCC가 매우 취약한 환경에 산다고 추정한 33억~36억 명의 상당수는 관측소·보험·디지털 기록이 가장 부족한 지역에 있다. 과거 데이터로 학습하는 AI는 데이터가 축적된 곳에서 가장 잘 작동한다.
적응의 AI가 가장 경계해야 할 실패는 틀린 예측이 아니다. 정확한 예측이 이미 가진 사람에게만 닿는 것이다.
좋은 적응 AI의 다섯 가지 조건
현명하게 함께 살아가기
줄이는 싸움은 계속된다. 견디기 위한 준비는 지금 필요하다. 적응은 감축의 포기가 아니다. 온도를 0.1°C라도 덜 올리면 적응해야 할 몫도 그만큼 줄어든다. 동시에 이미 도착한 더위와 물 앞에서 사람을 지키는 일은 미룰 수 없다.
AI는 그 위험을 더 잘게, 더 일찍 볼 수 있게 해준다. 다만 그 눈이 가장 먼저 향해야 할 곳은 데이터가 가장 적고 목소리가 가장 작은 곳이다. 파리협정 10년, 적응의 성적표는 바로 그곳에서 매겨진다.
파리협정의 세 번째 축은 돈이다. 약속된 액수는 해마다 커지는데, 그 돈이 무엇을 바꿨는지는 여전히 흐릿하다. AI는 이 흐릿함을 걷어낼 수 있을까, 그리고 어디서 멈춰야 할까.
파리협정 2조는 기온 상승 억제, 기후 영향에 적응하는 능력 증대, 재원 흐름을 저탄소·기후회복력 경로와 일치시키는 세 가지 장기 목표를 나란히 둔다. 앞의 두 목표가 무엇을 할지에 관한 것이라면, 세 번째는 누가 비용을 댈지에 관한 것이다. 9조는 선진국이 개도국의 감축과 적응을 돕기 위해 재원을 제공하도록 규정하며, 적응과 감축의 균형을 요구한다. 10조는 기술 개발과 이전을 다룬다.
기후 재원의 문제는 돈이 부족하다는 것만이 아니다. 그 돈이 무엇을 바꿨는지 아무도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숫자로 보는 기후 재원
기후 재원 집계는 무엇을 기후 재원으로 보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대출의 액면가를 포함하는지, 사업 가운데 기후 목적의 비중을 어떻게 잡는지에 따라 기관·연도별 수치를 직접 비교하기 어렵다.
1,000억에서 1.3조까지
목표는 늘 커졌고, 달성은 늘 늦었다. 목표가 커질 때마다 무엇을 세느냐의 범위도 함께 넓어졌다.
1달러가 개도국에 닿기까지
총액만 보면 약속은 지켜지고 있다. 그러나 돈을 형태·용도·도착지로 쪼개면 전혀 다른 그림이 나온다.
같은 2022년 수치도 OECD 보고 기준으로는 1,159억 달러지만, Oxfam의 실질 가치 추정에서는 대출의 액면가와 기후 목적이 일부인 사업을 그대로 세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공식 집계는 약속 이행을 판정하는 숫자지만, 실질 가치는 방법론에 따라 달라지는 추정치다.
세 가지 오래된 논쟁
첫째는 대출인가, 무상인가의 문제다. 공적 기후 재원의 약 3분의 2가 대출이다. 재생에너지 발전소처럼 수익이 나는 사업에는 대출이 합리적일 수 있지만, 제방이나 조기경보처럼 수익이 없는 적응 사업, 이미 부채가 무거운 저소득국에까지 대출을 쓰면 기후 지원은 부채 부담으로 되돌아온다. NCQG 협상에서 개도국은 무상·양허성 재원의 명시적 비중을 요구했지만, 결정문에는 수치로 담기지 않았다.
둘째는 이중계상이다. 기존 개발원조를 기후 재원으로 다시 표시하거나, 기후 목적이 일부인 사업을 전액 기후 재원으로 잡거나, 탄소 크레딧 감축 실적을 판매국과 구매국이 모두 자기 성과로 주장하는 방식이다. 파리협정 6조는 마지막 문제를 막기 위해 국가 간 감축 실적 이전 때 상응조정으로 한쪽 장부에서 빼도록 한다.
셋째는 무엇이 효과인가의 문제다. 감축에는 tCO₂e라는 공통 단위가 있지만, 적응과 손실·피해에는 그런 단위가 없다. 측정하기 쉬운 감축으로 자금이 쏠리고, 측정하기 어려운 적응은 뒤로 밀린다. 적응 재원이 전체의 약 4분의 1에 머물고, 2035년 적응 수요가 현재 흐름의 12~14배로 추정되는 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측정할 수 있는 것에 돈이 몰린다. 그렇다면 측정의 도구를 바꾸면 돈의 방향도 바뀔 수 있다.
AI가 들어갈 세 자리
기후 재원의 한 주기는 어디에 줄지 고르고, 제대로 쓰였는지 확인하고, 투자자와 시민에게 알리는 과정으로 요약된다. AI는 세 단계 모두에 들어갈 수 있지만 성숙도는 제각각이다.
고르기: 기계학습은 과거 사업의 성과 평가, 위성으로 본 지역 변화, 기후 위험 지도, 인구·빈곤 데이터를 결합해 비슷한 조건의 사업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추정할 수 있다. 감축에서는 달러당 감축량, 적응에서는 위험에 노출된 인구 대비 보호 효과가 지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데이터가 풍부한 해안 도시가 ‘효과 높음, 불확실성 낮음’으로 평가되고 관측 공백이 큰 더 취약한 도시가 밀려날 수 있다. 따라서 AI는 순위를 매기는 기계가 아니라 근거와 불확실성, 데이터의 빈 곳, 모델이 보지 못한 요인을 함께 제시하는 도구여야 한다.
확인하기: MRV, 즉 측정·보고·검증에서는 위성과 기계학습이 현장 방문과 서류를 상당 부분 보완한다. 메릴랜드대 GLAD 연구실의 산림 교란 경보는 Landsat(30m, 약 8일 주기)과 Sentinel-2(10m) 영상으로 열대림 손실을 거의 실시간으로 표시하며, 2026년 1월부터는 산림 밖 식생까지 포괄하는 경보가 통합됐다. Climate TRACE는 위성 약 300기와 센서 약 1만 1,000개의 데이터를 AI로 결합해 시설 단위 배출을 추정하고 매달 갱신한다.
이 도구가 극적으로 쓰인 분야는 산림 보전 탄소 크레딧, 즉 REDD+ 검증이다. 2023년 『사이언스』에 실린 West 등의 연구는 6개국 26개 사업지를 위성 기반 합성통제법으로 분석했다. 기준선 자료가 충분한 18개 사업에서 실제 감축과 연결되는 크레딧은 약 6%에 불과하다고 추정했다. 다만 Verra는 비교 지역이 너무 적다고 방법론을 반박했고, 연구 오류를 지적하는 반론 논문도 나왔다. 위성과 알고리즘은 정답을 주기보다 공개된 방법으로 반박과 재검증이 가능한 장을 만든다.
알리기: 2023년 전 세계 기후 재원은 약 1.9조 달러였고, 대부분은 민간과 국내 자금이었다. 재원 흐름의 정렬을 보려면 기업과 금융기관의 공시를 읽어야 한다. ISSB가 2023년 6월 발표한 IFRS S2는 기후 관련 위험과 기회, 온실가스 배출, 시나리오 분석 공시를 요구한다. 언어모델은 전환 계획의 목표 연도와 중간 목표를 뽑고, 전년도 보고서와 비교해 바뀐 전제를 찾으며, 넷제로를 말하면서 화석연료 설비투자는 확대하는 불일치를 표시할 수 있다.
AI가 확인할 수 있는 것, 없는 것
물리적으로 관측 가능한 것에는 AI가 강하다. ‘없었다면’이라는 반사실은 추정할 수 있을 뿐이며, 공정성과 책임은 애초에 계산의 영역이 아니다.
알고리즘이 배분을 정할 때의 위험
첫 번째 위험은 데이터 편향이다. 관측소·재난 기록·통계가 촘촘한 나라일수록 모델은 자신 있게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기록이 빈약한 최빈국과 소도서국은 불확실성 때문에 불리해진다. 2024년 저소득국에 간 돈이 96억 달러에 그친 현실에 알고리즘이 또 하나의 장벽을 얹을 수 있다.
두 번째는 배분의 공정성이다. 달러당 감축량 극대화는 효율적으로 들리지만, 싸게 줄일 수 있는 중소득국의 대형 사업으로 돈을 몰아줄 수 있다. 취약성·역사적 책임·형평을 목적함수에 어떻게 넣을지는 기술 문제가 아니라 가치의 선택이며, 그 선택은 공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세 번째는 책임의 공백이다. 모델이 추천한 사업이 실패하면 누가 책임지는가. ‘알고리즘이 그렇게 판단했다’는 말은 실제 결정자를 지운다. 모델 버전, 입력 데이터, 최종 결정자와 그 근거를 기록하고, 수원국이 이의를 제기할 통로가 있어야 한다.
돈이 이만큼 모자랄 때, 알고리즘의 효율은 누구를 먼저 탈락시킬지를 정하는 기술이 되기 쉽다.
기후 재원에 AI를 쓸 때의 다섯 원칙
첫째, 숫자보다 실질 가치를 먼저 본다. 액면가 대출과 무상 지원을 같은 1달러로 세지 않고, 증여 등가 기준을 함께 제시해야 한다. 둘째, 모델은 추천하고 사람은 결정한다. 효과 예측 점수는 배분 회의의 입력값일 뿐이며, 최종 결정자와 근거가 기록돼야 한다.
셋째, 데이터가 없는 곳을 효과가 없는 곳으로 읽지 않는다. 관측망이 빈약한 국가는 불확실성이 크게 나오고 사업은 뒤로 밀리기 쉬우므로, 데이터 공백 자체를 지원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넷째, 검증 결과를 공개한다. 위성 판독과 모델 추정의 방법·코드·불확실성을 공개해야 반론과 재검증이 가능하다.
다섯째, 받는 쪽이 검증에 참여한다. 현장 공동체와 수원국 기관이 데이터를 만들고 해석하는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멀리서 내려다보는 검증만으로는 누구를 위한 사업인지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을 측정하라
돈의 크기보다, 돈이 바꾼 것을 세야 한다. 파리협정 10년 동안 기후 재원의 숫자는 커졌지만 신뢰는 그만큼 자라지 않았다. AI는 숲이 사라졌는지, 공장이 돌아가는지, 보고서가 서로 모순되는지를 이전보다 훨씬 싸고 빠르게 확인해 준다. 이 능력은 선진국의 약속을 검증하는 데에도, 개도국의 성과를 입증하는 데에도 쓰일 수 있다.
다만 누가 먼저 받아야 하는지, 어떤 조건이 정의로운지는 여전히 사람이 공개적으로 답해야 할 질문이다. 좋은 도구는 그 질문을 피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더 정직하게 마주하게 해 준다.
앞의 여섯 편은 AI가 기후 대응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살폈다. 이 마지막 글은 반대편 저울에 선다. AI는 전기를 먹고, 물을 마시고, 때로는 가스 터빈을 돌린다. 두 쪽을 한 장부에 올려야 정직한 결론에 닿는다.
이 시리즈는 2015년 12월 파리에서 채택된 협정의 목표, 즉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산업화 이전 대비 2°C보다 훨씬 낮게 유지하고 1.5°C로 제한하도록 노력한다는 목표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AI는 기온 관측, 감축 약속 추적, 적응 설계, 기후 재원 배분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학습과 모든 응답 뒤에는 발전소, 냉각탑, 반도체 공장이 있다.
AI는 파리협정의 편인가. 답은 단순하지 않다. ‘조건에 따라’다.
01 · 데이터센터 전력, 6년 만에 두 배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25년 『Energy and AI』 보고서에서 AI와 에너지를 정면으로 다뤘고, 2026년 『Key Questions on Energy and AI』에서 수치를 갱신했다. 데이터센터는 2024년 세계 전력의 약 1.5%를 썼다. 비중보다 중요한 것은 증가 속도다.
2030년 값은 시나리오에 따라 폭이 크다. 2024년 415TWh에서 2025년 485TWh로 한 해에만 70TWh가 늘었고, IEA의 2026년 전망에서는 AI 중심 데이터센터 전력이 2030년까지 세 배가 된다.
IEA(2025)에 따르면 현재 데이터센터 전력의 거의 60%는 화석연료, 약 27%는 재생에너지, 약 15%는 원자력에서 온다. IEA는 2035년 청정 전력 비중이 약 60%까지 오를 것으로 보지만, 데이터센터용 가스 발전량도 2024년 120TWh에서 2035년 293TWh로 두 배 이상 늘 것으로 전망한다. 청정 전력이 늘어도 화석 전력이 줄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02 · 약속은 내려가는데, 곡선은 올라간다
구글은 2030년 넷제로와 ‘24시간 무탄소 전력’을, 마이크로소프트는 2030년 ‘탄소 네거티브’를 약속했다. 업계에서 가장 공격적인 목표였지만, AI 인프라 경쟁이 본격화된 뒤 두 회사 모두 배출 증가를 공시했다.
두 회사가 수치를 숨긴 것은 아니다. 구글은 탈탄소 노력이 없었다면 2025년 탄소발자국이 다섯 배는 컸을 것이라고 밝혔고, 그해 12GW가 넘는 청정에너지 계약을 새로 맺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연간 전력 소비 전체를 재생에너지로 매칭했다. 그럼에도 총량은 늘었다. 구글의 최고지속가능성책임자는 AI 인프라 구축이 ‘전력망의 탈탄소화보다 빠르게’ 가속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기는 연말 정산을 하지 않는다. 배출은 발생한 그 시간, 그 전력망에서 일어난다.
연간 100% 재생에너지 매칭은 매년 구매한 재생에너지 총량과 사용 전력 총량이 같다는 뜻일 뿐, 밤이나 무풍 시간에 데이터센터가 가스 전력을 쓰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구글의 2025년 시간 단위 무탄소 전력 비율 약 65%는 이 간극을 보여준다.
03 · 터빈, 원자로, 그리고 물
데이터센터는 몇 년 만에 지어지지만 송전선과 발전소는 더 오래 걸린다. 그 틈을 메우는 가장 빠른 수단은 대개 가스다. 미국 멤피스의 xAI 데이터센터 ‘콜로서스’는 한때 허가 없이 최대 35기의 가스 터빈을 가동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2025년 7월 셸비 카운티 보건당국은 백업 용도로 제한한 터빈 15기의 대기 배출 허가를 내줬고, 지역 시민단체와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는 이에 이의를 제기했다.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있다. 2024년 9월 마이크로소프트는 콘스텔레이션과 20년 전력구매계약을 맺어 스리마일섬 원전 1호기, 즉 크레인 청정에너지센터로 개명된 시설의 재가동을 뒷받침했다. 같은 해 10월 구글은 카이로스 파워와 2035년까지 총 500MW 규모 소형모듈원전 전력을 구매하는 계약을 체결했고, 첫 원자로는 2030년 가동을 목표로 한다. 새 무탄소 전원을 더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원전이 돌아가기 전 오늘의 추가 수요는 오늘의 전력망이 감당해야 한다.
물도 문제다. 캘리포니아대 리버사이드의 샤오레이 런 연구팀은 GPT-3 학습에 마이크로소프트 미국 데이터센터 기준 총 약 540만 리터, 이 중 현장 냉각수만 약 70만 리터가 쓰였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 연구팀은 2027년 세계 AI 수요가 연간 42억~66억㎥의 취수를 유발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추정 폭은 크지만, 물 부족 지역의 데이터센터는 기후 적응과 정면으로 충돌할 수 있다.
04 · 제번스 역설: 효율적일수록 더 많이 쓴다
1865년 경제학자 윌리엄 스탠리 제번스는 증기기관의 석탄 효율이 좋아지자 석탄 소비가 줄기는커녕 늘었다고 지적했다. 효율은 단위당 비용을 낮추고, 낮아진 비용은 새로운 쓰임을 연다. AI에서도 이 역설은 교과서처럼 재현되고 있다.
IEA(2026)도 AI 작업당 전력은 에너지 역사상 유례없는 속도로 줄고 있지만, 사용자 증가와 AI 에이전트 같은 에너지 집약적 활용의 확산으로 총량은 늘고 있다고 지적한다. 두 수치는 프롬프트 1건과 회사 전체 전력처럼 측정 대상이 다르며, 인과를 단정하는 비교가 아니다. 단위 효율과 총량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효율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총량을 정하는 것은 효율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에 쓰기로 하는가다.
05 · AI의 기후 장부: 차변과 대변
데이터센터 전력 사용에 따른 배출은 아직 세계 CO₂ 배출의 약 0.5% 수준이다. 반면 AI를 에너지·산업·건물·수송에 제대로 활용한다면 데이터센터가 늘리는 배출보다 훨씬 많은 배출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한쪽은 이미 발생한 비용이고, 다른 한쪽은 실현 조건이 붙은 잠재력이다.
1,400Mt 감축은 기존 AI 응용이 널리 도입될 경우의 탐색적 추정이며, 반동 효과는 반영되지 않았다. 왼쪽은 이미 청구된 계산서이고 오른쪽은 아직 받지 않은 어음이다. 특히 배출을 늘리는 쪽은 주로 범용 챗봇·이미지·영상 생성 같은 소비형 활용이고, 감축 쪽은 대개 전력망 운용·공정 제어처럼 작고 특화된 모델이다. ‘AI가 기후를 구한다’는 말로 대형 모델 확장을 정당화한다면 두 칸을 섞는 셈이다.
06 · AI가 ‘넷 플러스’가 되는 네 가지 조건
AI를 쓰지 말자는 결론은 현실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관측, 추적, 적응, 재원 배분에서 AI는 실제 가치가 있다. 다만 아래 네 조건이 함께 충족될 때에만 AI는 장부의 오른쪽에 설 수 있다.
07 · 책임 있는 사용을 위한 점검표
개인과 조직 모두 자신의 AI 사용이 장부의 어느 쪽에 놓이는지 점검할 수 있다. 점수는 정밀한 측정이 아니라 대화를 시작하기 위한 예시다.
개인에게는 짧은 질문에 가벼운 모델을 쓰고 긴 추론은 꼭 필요할 때만 쓰며, 프롬프트를 다듬어 재생성 횟수를 줄이는 실천이 제안된다. 영상·이미지 생성은 텍스트로 초안을 먼저 확정한 뒤에 한다. 조직은 토큰·GPU 시간 등 AI 사용량을 스코프 3 배출 회계에 포함하고, 조달 기준에 에너지·물·배출 공시와 24/7 CFE 여부를 넣을 수 있다. 업무별 기본 모델을 작은 모델로 설정하고, AI 도입 효과를 배출 감축으로도 측정해야 한다.
08 · 파리협정 10년, 도구에게 묻는 질문
파리협정은 각국이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5년마다 더 나은 목표를 내며, 결과를 투명하게 점검받는 구조다. 강제보다 공개와 진전에 기대는 협정이다. AI에도 같은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 스스로 측정하고, 공개하고, 매번 조금씩 나아지는 것.
기술 낙관론은 계산서를 보지 않고, 기술 비관론은 어음을 찢어버린다. 필요한 것은 장부를 끝까지 적는 태도다. AI가 파리협정의 편이 되는 것은 기술의 속성이 아니라 선택의 결과다.
AI는 누구의 편도 아니다. 우리가 쓰는 방식이 편을 정한다.
측정하고, 공개하고, 매 시간의 청정 전력으로 돌리고, 작은 모델로 충분한 곳에는 작은 모델을 쓰며, 필요한 곳에만 AI를 써야 한다. 이 원칙을 지킬 때 AI는 1.5°C를 향한 길에서 짐이 아니라 도구가 된다. 파리협정 10년, 우리가 도구에게 요구해야 할 것은 영리함이 아니라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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