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했던 건 지식이 아니라, 첫 발을 뗄 때 옆에 있어줄 사람이었다.
지난 1년 동안 기업에서 걸려온 전화의 첫 문장은 거의 같았다. “AI 전환을 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대기업 임원이든, 직원 열 명 남짓한 SI 회사 대표든, 시드니에서 만난 교민 사업주든 다르지 않았다.
처음엔 이 문장을 정보 부족의 표현이라고 읽었다. 방법을 모르니 방법을 알려주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진단 프레임을 만들고, 우선순위 매트릭스를 만들고, 90일 로드맵을 만들었다.
그런데 자료를 다 드리고 나서도 같은 자리에서 멈추는 경우를 여러 번 봤다. 문서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분들에게 부족했던 건 지식이 아니라 첫 발을 뗄 때 옆에 있어줄 사람이었다. 이 얘기를 하려고 한다.
01 · What Palantir Invented Was a Seat
팔란티어가 발명한 건 기술이 아니라 자리였다
Forward Deployed Engineer, 줄여서 FDE. 팔란티어가 만든 개념이다. 자기네 최고 엔지니어를 고객사 사무실에 직접 앉혀두는 방식이다. 제품을 납품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파견해서, 고객의 실제 업무 흐름을 옆에서 보면서, 며칠에서 몇 주 안에 작동하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처음 이 개념을 접했을 때 나도 시큰둥했다. 26년 동안 IT 업계에 있으면서 ‘인력 파견’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걸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다. SM이니 상주니 하는 말들. 결국 사람 넣고 인건비 받는 구조 아닌가.
그런데 FDE가 실제로 해결한 문제는 인력 공급이 아니었다. “지금 있는 곳”과 “가고 싶은 곳” 사이의 거리를 물리적으로 좁혀준 것이다. 이건 오래된 사업이다. 컨설팅도, 코칭도, 교육도, 자기계발 산업 전체가 이 전제 위에 서 있다. 사람은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어디로 가고 싶은지 알아도, 그 사이를 혼자서는 잘 건너지 못한다.
팔란티어는 그 사이에 사람을 하나 놓았을 뿐이다. 그게 전부다. 그리고 그게 통했다.
숫자는 이미 나와 있다
5%
실질 손익 효과를 낸 기업 AI 배포 — 나머지 95%는 파일럿에서 멈췄다
MIT Project NANDA, The GenAI Divide, 2025
56%
지난 1년 AI 투자에서 매출 증가도 비용 절감도 얻지 못한 CEO
PwC 29th Global CEO Survey, 2026.1
12%
매출 증가와 비용 절감을 ‘둘 다’ 얻은 CEO — 여덟 중 하나
PwC 29th Global CEO Survey, 2026.1
3×
AI 기반(책임 있는 AI·전사 통합)을 갖춘 기업 CEO가 유의미한 재무 성과를 보고할 확률
PwC 29th Global CEO Survey, 2026.1
MIT의 Project NANDA는 2025년 「The GenAI Divide」 보고서에서 300건 이상의 기업 AI 배포 사례를 분석했다. 실질적인 손익 효과를 만들어낸 건 5%였다. 나머지 95%는 파일럿에서 멈췄다. 보고서는 그 원인이 모델 품질도, 규제도 아니라고 못박았다. 접근 방식의 문제였다.
PwC가 2026년 1월 다보스에서 발표한 29차 글로벌 CEO 서베이는 더 직접적이다. 95개국 CEO 4,454명 중 56%가 지난 1년간 AI 투자에서 매출 증가도 비용 절감도 얻지 못했다고 답했다. 둘 다 얻은 CEO는 12%. 여덟 명 중 한 명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숫자가 하나 더 있다. PwC는 AI 기반—책임 있는 AI 체계, 전사 통합이 가능한 기술 환경 같은 것들—을 제대로 갖춘 기업의 CEO가 의미 있는 재무 성과를 보고할 확률이 세 배 높다고 밝혔다. MIT 보고서에서도 비슷한 결이 읽힌다. 외부 전문 파트너와 함께 도입한 경우가 내부에서만 만든 경우보다 성공률이 훨씬 높았다.
정리하면 이렇다. 실패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었고, 성공한 소수는 대체로 밖에서 사람을 데려온 쪽이었다.
02 · The Gap Is Not in the Technology
격차는 기술에 있지 않다
나는 기업 AX 프로젝트를 설계할 때 늘 같은 말부터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바꿀 수 없다고. 그래서 업무를 전부 꺼내 눈에 보이게 만드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최근 1년 사이에 하나를 더 배웠다. 보인다고 해서 움직여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업무 지도를 다 그리고, 우선순위까지 숫자로 뽑아놓고도 손을 못 대는 조직이 있다. 왜 못 대느냐고 물으면 답이 안 나온다. 예산 때문도 아니고 인력 때문도 아니다. 조금 더 대화를 이어가 보면 결국 이런 말이 나온다.
“이걸 했다가 잘못되면 제가 책임을 져야 하는데요.”
“저희 직원들이 반발할 것 같아서요.”
“솔직히 제가 잘 모르는 걸 시키기가 어렵습니다.”
기술 문제가 아니다. 두려움이다. 불확실성이다. 그리고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아랫사람에게 지시해야 하는 리더의 난처함이다.
Anthropic의 다리오 아모데이는 2030년까지 화이트칼라 업무의 상당 부분이 AI로 대체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술의 시계는 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게 맞다. 그런데 현장의 시계는 훨씬 느리게 간다. 병목은 모델도 아니고, 에이전트도 아니고, 토큰 비용도 아니다. 사람이 AI를 자기 조직에 흡수하는 속도다.
2008년 금융위기를 겪었고 2020년 팬데믹을 견뎌낸 노련한 경영자들이, AI 앞에서는 낯설게 흔들린다. 이건 링크드인에서 ‘AI 활용 팁 5가지’ 하나 더 읽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03 · So, the FDX
그래서 FDX다
FDE는 기술 격차를 몸으로 메웠다. 현장에 앉아서, 실제 워크플로를 보면서, 짧은 시간 안에 작동하는 걸 만들어내고, 그 결과에 책임을 졌다. 문제는 이 뛰어난 엔지니어들이 대개 의사결정권자와는 멀리 앉아 있다는 점이다. 실무팀 옆에는 앉지만 경영진 옆에는 앉지 않는다.
그런데 AI 도입의 가장 강력한 선행 지표는 CEO 본인이 AI를 실제로 쓰고 있느냐다. 위가 안 움직이면 아래에서 만든 성과는 확산되지 않는다. 파일럿 하나로 끝난다. 95%가 여기서 멈춘다.
그렇다고 C레벨을 한 달 만에 교체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온 개념이 Forward Deployed Executive, FDX다. 경영진 옆자리에 파견되는 사람. 조직 안에 AI 챔피언이 없다면, 밖에서 데려와 그 자리에 앉히는 것이다.
이름은 새롭지만 하는 일은 명확하다. 경영자 옆에 앉아서 같이 해보는 것. 같이 프롬프트를 써보고, 같이 실패하고, 같이 다시 해보고, “이거 해도 됩니다, 제가 옆에 있습니다”라고 말해주는 것. Rick Manelius가 인용한 한 임원의 말이 이 역할의 본질을 정확히 짚는다. “당신은 그냥 제 안심 담요예요. 곁에 있어주세요.”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웃지 못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정확히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04 · Consultants Leave Reports; the FDX Leaves Habits
컨설턴트는 보고서를 남기고, FDX는 습관을 남긴다
이 둘의 차이는 결과물이 아니라 남는 것에 있다. 컨설팅 프로젝트가 끝나면 보고서가 남는다. 잘 만든 보고서는 값어치가 있다. 나도 만든다. 하지만 보고서는 서랍에 들어간다. 조직의 손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FDX가 하는 일은 세 단계로 나뉜다.
DFY
Done For You
처음엔 내가 만들어 보여준다. 되는 걸 눈으로 봐야 믿는다. 이 단계를 건너뛰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DWY
Done With You
다음엔 같이 만든다. 경영자의 손이 키보드 위에 올라가야 한다. 여기가 가장 어렵고, 대부분의 프로젝트가 여기서 실패한다.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없으면, 사람은 자기가 못 하는 일 앞에서 그냥 자리를 뜬다.
DIY
Do It Yourself
마지막엔 혼자 하게 만든다. 그리고 빠진다. 이게 목표다.
보고서를 남기는 일과 습관을 남기는 일은 난이도가 다르다. 후자는 옆에 앉아 있는 시간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일은 문서로도 강의로도 대체되지 않는다.
05 · The Conditions — an Evolved Solution Architect
FDX의 조건: 솔루션 아키텍트의 진화형
10년 전 시장에서 가장 비싼 인재는 솔루션 아키텍트였다. 기술(아키텍처)과 관리(비용·일정·팀)와 사업(ROI·시장)을 동시에 아는 사람. 세 언어를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에 비쌌다. 2026년의 FDX는 여기에 세 가지가 더 붙는다.
적응력. 6개월 전 방법론이 지금 안 통한다. 자기가 어제 만든 걸 오늘 버릴 수 있어야 한다.
AI-first 사고. 도구를 몇 개 쓸 줄 아느냐가 아니다. 어떤 문제를 봤을 때 “이건 사람이 해야 하는 일”과 “이건 넘겨야 하는 일”이 반사적으로 갈리는가의 문제다.
만들어낼 수 있는 손. 대신 만들고, 같이 만들고, 결국 혼자 만들게 하는 것. 여기에는 실제로 만들 줄 아는 능력이 전제된다. 못 만드는 사람은 조언밖에 못 한다. 조언은 이미 충분히 넘친다.
여기에 나는 하나를 더 얹고 싶다. 현장에 앉아 있어 본 시간. 나는 개발자로, PM으로, ERP 컨설턴트로 40개가 넘는 글로벌 기업 구축 프로젝트를 지나왔다. 그 시간이 준 건 기술 지식이 아니라, 조직이 어디서 어떻게 무너지는지에 대한 감각이다. 임원이 “그건 좀 어렵겠는데요”라고 말할 때 그게 기술적 반대인지 정치적 반대인지 구분하는 능력. 이건 배워서 되는 게 아니라 맞아봐야 아는 것이다.
06 · 이 일이 AI에게 넘어가지 않는 이유
FDX가 파는 건 정보가 아니라 동석(同席)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합성 불가능한 자산이라는 말을 써왔다. 복제할 수 없고, 생성할 수 없고, 시간을 들여야만 쌓이는 것들. 현장의 신뢰, 함께 실패해본 경험, 그 사람의 회사 사정을 아는 맥락 같은 것들이다.
FDX가 파는 건 정보가 아니다. 정보는 이미 공짜다. FDX가 파는 건 동석(同席)이다. AI는 세상의 거의 모든 답을 알고 있지만, 겁먹은 임원 옆에 앉아 있어 주지는 못한다. 정확히는, 앉아 있어 줄 수는 있지만 그 임원이 그걸 안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두려움은 정보의 부재가 아니라 관계의 부재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일은 시간을 파는 일이 아니다. 넘어가지 못하는 사람을 넘어가게 만드는 일이고, 그 값은 시간당으로 매겨지지 않는다. 자기 노동을 시간 단위로 쪼개 파는 사람은 시장이 정한 가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격차를 메우는 사람은 자기가 값을 매긴다. 같은 일을 하고도 어느 쪽에 서느냐가 갈리는 지점이 여기다.
07 · Possible Precisely Because There Is No Organisation
조직이 없어서 가능한 일
여기서부터는 솔로프리너 이야기다. FDX는 큰 조직이 하기 어려운 일이다. 대형 컨설팅펌은 이 일을 못 한다. 팔 수 있는 단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경영자 한 명 옆에 몇 달을 앉아 있는 일은 인력 배치표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파트너급이 직접 앉아 있어야 하는데, 그 사람들의 시간은 다른 데 팔려 있다.
반대로 개인은 할 수 있다. 오히려 조직이 없어서 할 수 있다. 결재 없이 움직이고, 오늘 배운 걸 내일 쓰고, 한 사람에게 깊게 붙을 수 있다. 내가 솔로프리너의 시대를 계속 이야기해온 이유가 여기 있다. AI는 개인이 조직을 흉내 낼 수 있게 만들었지만, 더 중요한 건 조직이 흉내 낼 수 없는 자리를 개인에게 열어줬다는 점이다.
미국 기업들이 AI에 수천억 달러를 쏟아붓고 90% 이상이 회수를 못 하고 있다. 우리 기업들도 다르지 않다. 이건 나쁜 뉴스이면서 동시에 가장 정직한 기회의 신호다. 격차가 크다는 건, 그 격차를 메우는 사람의 값이 비싸다는 뜻이니까.
“AI가 내 자리를 뺏을까”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시장에 없는 건 AI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AI를 아는 사람 옆에 앉아 있어 줄 사람이라고.
기술의 격차는 이미 좁혀졌다.
남은 건 옆자리의 격차다.
기술은 넘친다. 도구도 넘친다. 방법론도 넘친다. 부족한 건 경영자 옆자리에 앉아서 “해도 됩니다, 제가 같이 하겠습니다”라고 말해줄 사람이다.
이 글은 Rick Manelius의 「Forward Deployed Executives: The Next Billion-Dollar AI Unblock」(Startup CXO Playbook, 2026)을 읽고, 지난 1년간 기업 AX 자문과 워크숍 현장에서 확인한 것들을 함께 정리한 것이다. 인용한 수치는 MIT Project NANDA 「The GenAI Divide: State of AI in Business 2025」와 PwC 「29th Global Annual CEO Survey」(2026년 1월)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