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않으면 손해라는 착각
AI 시대의 과잉 생산. 리셋되는 한도, 출시일의 테스트 러시, ‘써 봤다’가 콘텐츠가 되는 문화 — 우리는 필요 없는 것을 만들도록 설계된 환경 안에 있다.
2026년 10월 · 글 고승원
00 · Launch day, Friday night
출시일의 타임라인, 그리고 금요일 밤
새 모델이 출시된 날, 타임라인은 거의 같은 화면으로 채워진다. 같은 질문, 같은 그림, 같은 코드 한 조각. ‘이번 모델 미쳤다’는 문장과 함께 올라오는 비슷한 스크린샷들.
나도 그 대열에 있다. 새 모델이 나오면 가장 먼저 써 보는 사람 중 하나이고, 그 결과를 공유한 적도 많다. 그러니 이 글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금요일 밤이 있다. 토요일 새벽, 주간 사용 한도가 초기화되기 몇 시간 전. 남은 사용량을 보고 있으면 묘한 기분이 든다. 이걸 다 쓰지 않으면 손해 아닌가. 그래서 딱히 필요하지 않은 것을 만든다. 읽지 않을 리서치 보고서, 쓸 일 없는 앱의 프로토타입, 몇 장 더 뽑아 보는 이미지.
나는 이 감정이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의지가 약해서도, 생각이 없어서도 아니다. 설계된 감정이다.
AI 슬롭은 AI의 문제가 아니다. 필요 없는 것을 만들게 하는 구조의 문제다.
01 · The word of the year
사전이 먼저 알아챘다
2025년, 영어권의 두 사전이 같은 단어를 골랐다. 메리엄-웹스터는 올해의 단어로 ‘slop’을, 호주의 맥쿼리 사전은 ‘AI slop’을 선정했다.
Merriam-Webster · 2025
slop
“주로 인공지능을 이용해 대량으로 만들어진 저품질 디지털 콘텐츠”
Macquarie Dictionary · 2025
AI slop
“생성형 AI가 만든 저품질 콘텐츠. 종종 오류를 담고 있으며, 사용자가 요청하지 않은 것”
나는 맥쿼리 정의의 마지막 구절에 눈이 갔다. ‘요청하지 않은’. 우리는 보통 슬롭을 품질의 문제로 본다. 어색한 문장, 손가락이 여섯 개인 그림. 하지만 품질은 모델이 좋아지면 해결된다. 해결되지 않는 건 따로 있다. 아무도 원하지 않았는데 만들어졌다는 사실.
그러니 슬롭의 반대말은 ‘고품질’이 아니다. ‘목적’이다. 아무리 매끈해도 다음 행동이 없는 결과물은 슬롭이 될 수 있고, 조금 거칠어도 누군가의 일을 끝내 준 결과물은 슬롭이 아니다.
회사 안에서는 ‘워크슬롭’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완성된 것처럼 보이지만 일을 실제로 진척시키지 않는 AI 결과물. 만든 사람의 시간은 줄었는데, 받은 사람의 시간은 늘었다. 비용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옮겨 간 것이다.
51.7%
표본 영문 웹 기사 중 AI가 생성한 것으로 판정된 비율 (2025년 5월 기준, 2024년 11월부터 사람이 쓴 기사와 비슷한 수준에서 정체)
Graphite, 2025
40%
최근 한 달 사이 동료에게서 ‘워크슬롭’을 받은 적 있다고 답한 미국 풀타임 사무직 비율
BetterUp Labs · Stanford, HBR 2025
≈2h
워크슬롭 한 건을 처리하는 데 드는 평균 시간 — 만든 사람이 아낀 시간이 받은 사람에게 넘어간다
BetterUp Labs · Stanford, HBR 2025
Graphite 수치는 Common Crawl 표본 6만5천 개 URL을 AI 판별기로 분류한 추정치다. 워크슬롭 수치는 미국 풀타임 사무직 1,004명 설문(2025). 조사 방법·연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02 · Two costs
공짜처럼 보이는 생성의 두 가지 비용
구독료는 이미 냈고, 버튼 한 번이면 된다. 그래서 생성은 공짜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비용은 두 군데에 남는다. 정보 생태계와 물리적 세계.
01
정보의 오염
필요 없이 만들어진 결과물도 어딘가에 남는다. 블로그에, 검색 결과에, 피드에. 저품질 콘텐츠가 쌓이면 사람은 좋은 것을 찾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쓴다.
더 조용한 문제도 있다. 웹은 다음 모델의 학습 재료다. 2024년 Nature에 실린 슈마일로프 등의 연구는 모델이 앞선 모델의 생성물로 반복 학습하면 분포의 가장자리가 사라지고 결과물이 점점 퇴화하는 ‘모델 붕괴’를 보였다. 중세 건축에 관한 글로 시작한 실험이 아홉 번째 세대에 이르러 산토끼 목록을 내놓았다.
공정하게 덧붙이면, 붕괴는 필연이 아니다. 같은 해 게르스트그라서 등은 생성 데이터가 사람의 데이터를 대체하지 않고 함께 쌓이면 붕괴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결과를 냈다. 그래서 진짜 질문은 ‘AI 데이터가 섞이는가’가 아니다. ‘사람이 만든 데이터가 계속 쌓이는가’다.
02
물리적 비용
‘클라우드’라는 말은 가볍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전기를 먹는 칩과, 그 칩을 식히는 물과, 그 칩을 만들기 위한 공급망이 있다. 생성 한 번은 이 세 가지를 조금씩 쓴다.
데이터센터 전력이 얼마나 늘어나는지, 빅테크의 배출이 왜 다시 증가하는지 같은 큰 그림은 AI는 파리협정의 편인가에서 다뤘다. 이 글에서는 반대편 끝, 한 번의 생성을 본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정직해야 한다.
개념도 · 슬롭의 순환
01
출시
새 모델이 나온다
02
테스트 러시
모두가 같은 질문을 던진다
03
공유
‘써 봤다’가 콘텐츠가 된다
04
저품질 축적
다시 열어 보지 않는 결과물이 쌓인다
05
학습 데이터 오염
웹이 다음 학습 재료가 된다
06
다음 모델
그 위에서 다시 만들어진다
필연이 아니라 경향을 그린 개념도다. 사람이 만든 데이터가 함께 쌓이고, 학습 데이터를 거르는 기술이 좋아질수록 고리는 약해진다.
03 · The numbers, honestly
질문 하나는 작다. 그게 함정이다
먼저 공정하게 말해야 한다. 텍스트 질문 하나의 에너지는 작다. 구글은 2025년 8월, 제미나이 앱 텍스트 프롬프트 하나의 중앙값이 0.24Wh, 물 0.26mL라고 공개했다. 대기 중인 유휴 장비와 데이터센터 냉각까지 포함한 수치이고, 구글의 비유로는 TV를 9초 남짓 보는 정도다.
질문 하나로 죄책감을 느낄 일은 아니다. 그런데 이 숫자 하나를 들고 ‘그러니 괜찮다’고 말하면 두 가지를 놓친다.
1회 생성당 에너지 · 공개된 측정치 · 로그 스케일
텍스트 생성 (오픈 모델 평균, 실험실 측정)
0.047 Wh
Luccioni et al., FAccT 2024
제미나이 앱 텍스트 프롬프트 (중앙값, 유휴 장비·냉각 포함)
0.24 Wh
Google, 2025
이미지 생성 (오픈 모델 평균)
2.9 Wh
Luccioni et al., FAccT 2024
짧은 영상 1편 (WAN2.1 1.3B)
≈90 Wh
Delavande et al., 2025
짧은 영상 1편 (WAN2.1 14B)
415+ Wh
Delavande et al., 2025
막대 길이는 로그 스케일이다 — 한 칸이 10배. 측정 환경(하드웨어, 모델, 해상도·길이, 데이터센터 오버헤드 포함 여부)이 서로 달라 직접 비교에는 한계가 있으며, 연구에 따라 수치는 크게 달라진다. 구글 수치는 상용 서비스의 중앙값이고, 나머지는 단일 GPU 실험실 측정이다. 추론 모드·에이전트 작업은 공개된 표준 측정치가 드물어 넣지 않았다.
01
무게가 다르다
같은 ‘생성’이라도 무게가 다르다. 루치오니 등의 측정에서 이미지 생성은 평균 2.9Wh로 텍스트 생성의 60배가 넘었다. 2025년 허깅페이스 연구진은 짧은 영상 한 편에 약 90Wh, 더 큰 모델은 415Wh 이상이 든다고 측정했다. 이미지의 약 30배, 텍스트의 약 2,000배다.
추론 모드와 에이전트는 한 번의 요청 안에서 긴 생각과 여러 번의 호출을 만든다. 아직 표준화된 공개 측정치는 드물지만, ‘질문 하나’라는 단위가 점점 의미를 잃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02
문제는 합계와 이유다
작은 숫자도 수없이 반복되면 더 이상 작지 않다. 그리고 그중 상당수가 아무도 다시 열어 보지 않는 결과물이라면, 그건 효율의 문제가 아니다. 낭비의 정의다.
그래서 나는 ‘AI는 에너지를 얼마나 쓰는가’보다 다른 질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에너지로 무엇을 했는가.’
04 · Why it happens
우리는 낭비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사람들이 AI로 필요 없는 것을 만드는 이유는 게을러서가 아니다.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느껴지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 개의 엔진이 있다.
01
사라지는 한도
많은 AI 구독에는 정해진 주기로 초기화되는 사용 한도가 있다. 예를 들어 Anthropic은 2025년 8월 28일부터 Claude Pro·Max 구독자에게 주간 한도를 도입했다. 일부 사용자가 Claude Code를 하루 24시간 돌리고, 계정을 공유·재판매하는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한도 자체는 합리적인 장치다. 연산 자원은 유한하고, 누군가는 나눠야 한다. 문제는 한도가 사용자에게 어떻게 느껴지는가다. 다음 주로 넘어가지 않는 사용량은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이 된다. 유효기간이 임박한 포인트, 배가 불러도 한 접시 더 가져오게 되는 뷔페와 같은 구조다.
02
출시일의 테스트 러시
새 모델이 나오면 수많은 사람이 거의 같은 테스트를 각자 반복한다. 개인에게는 합리적이다. 직접 확인하고 싶으니까. 하지만 전체로 보면 같은 실험을 수없이 되풀이하는 일이다. 개인의 합리성이 모이면 집단의 낭비가 된다.
03
‘써 봤다’의 콘텐츠화
결과물이 아니라 ‘써 봤다는 사실’이 목적이 되는 문화가 있다. 빠르게 써 보고, 빠르게 올리는 사람이 주목받는다. 그러면 결과물은 필요 없어도 된다. 필요한 건 스크린샷이다. 나도 이 보상 구조에서 자유롭지 않다.
지난 글 AI Passport에서 나는 AI 사용 권한이 사용자가 가지고 다니는 하나의 권리가 되어 서비스 사이를 이동하는 미래를 이야기했다. 이번 글은 그 이야기의 그림자다. 같은 권한이라도 ‘이번 주 안에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소모품’으로 설계되면, 그 권리는 낭비의 엔진이 된다.
사람들은 AI를 낭비하는 것이 아니다. 낭비가 합리적으로 느껴지도록 설계된 환경 안에서,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05 · Fair objections
반론도 대부분 맞다
이 글에 대한 반론을 나는 대부분 받아들인다. 그런데 반론을 하나씩 받아들일수록, 오히려 결론이 선명해진다.
반론 01
테스트에는 학습 가치가 있다. 직접 써 보지 않으면 모델을 판단할 수 없다.
답
맞다. 나도 새 모델은 직접 써 본다. 남의 스크린샷으로는 얻을 수 없는 감각이 있다. 다만 배우기 위한 테스트와 보여주기 위한 테스트는 다르다. 앞의 것은 내 일에 대한 질문으로 끝나고, 뒤의 것은 타임라인에 올라간 순간 끝난다.
반론 02
개인의 죄책감보다 전력망과 데이터센터의 효율이 훨씬 중요하다.
답
맞다. 구글은 1년 사이 텍스트 프롬프트 하나의 에너지를 33배 줄였다고 밝혔다. 큰 변화는 엔지니어링에서 나온다. 그래서 이 글은 개인을 탓하는 글이 아니다. 개인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구조를 묻는 글이다.
반론 03
모델 붕괴는 필연이 아니다. 사람의 데이터와 섞여 쌓이면 붕괴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연구도 있다.
답
맞다. 그런데 그 조건이 바로 핵심이다. 사람이 만든 데이터가 계속 쌓여야 한다. 슬롭이 사람의 글을 밀어내는 속도가 그 조건을 시험한다.
반론 04
텍스트 질문 하나의 에너지는 TV 몇 초 수준이다. 호들갑이다.
답
맞다. 질문 하나로 죄책감을 느낄 일은 아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금지가 아니라 기준이다. 문제는 한 번의 크기가 아니라, 횟수와 무게와 이유다.
틀린 질문은 ‘AI를 덜 써야 하는가’다. 맞는 질문은 ‘이 생성에 이유가 있는가’다.
06 · Criteria, not commandments
계명이 아니라 기준 — 생성 전 3초 점검
나는 ‘AI를 덜 쓰자’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나도 매일 쓰고, 앞으로 더 많이 쓸 것이다. 필요한 건 생성 버튼을 누르기 전 3초면 충분한 질문 몇 개다. 해당하는 항목을 눌러 보자.
점검 결과
0 / 5
지금은 만들지 않아도 괜찮다
남은 한도는 손해가 아니다. 정말 필요할 때를 위해 남겨 두자.
점수는 측정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묻기 위한 장치다. 저장되거나 전송되지 않는다.
세 가지만 기억해도 충분하다. 다음 행동이 있는가. 이미 있는가. 더 작은 것으로 충분한가. 이 질문들은 아끼라는 말이 아니다. 만든 것이 쓰이게 하라는 말이다.
07 · Design, not guilt
개인의 3초보다 플랫폼의 설계 하나
구조가 만든 문제는 구조로 푸는 것이 가장 빠르다. 사용자에게 절제를 부탁하기 전에, 절제가 손해가 되지 않게 만들 수 있다. 아래는 제안이다. 공급자에게도 연산 비용과 피크 부하를 줄이는 방향이다.
01
남은 사용량의 이월
쓰지 않은 사용량의 일부를 다음 주기로 넘긴다. 공급자는 피크 수요를 관리해야 하니 상한과 만료를 둔 부분 이월이면 된다. ‘쓰지 않으면 사라진다’가 ‘아껴 두면 남는다’로 바뀐다.
02
가벼운 작업은 작은 모델로
요약·분류·짧은 답변은 작은 모델로 자동 연결하고, 그 이유를 보여준다. 작은 모델로 처리한 요청은 한도를 덜 차감한다. 아끼는 행동이 보상받게 한다.
03
생성당 에너지 표시
식품의 영양성분표처럼, 생성 버튼 옆에 추정 에너지를 보여준다. 텍스트·이미지·영상의 차이를 사용자가 체감하게 한다. 정확한 숫자보다 크기의 감각이 중요하다.
04
출시일의 공유된 테스트
수많은 사람이 같은 테스트를 각자 반복하는 대신, 대표 예시와 비교 결과를 먼저 보여준다. 직접 써 보는 일은 각자의 일에 대한 질문으로 남긴다.
한도를 사라지는 소모품이 아니라 남는 자산으로 설계하면, 사용자는 스스로 아끼는 법을 배운다.
이번 주 금요일 밤에도 나는 남은 사용량을 볼 것이다. 아마 그 숫자가 조금 아까울 것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한 번 더 물어보려 한다. 이걸 만들면,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
남은 한도는 손해가 아니다.
이유 없는 생성이 손해다.
출처: Merriam-Webster — Word of the Year 2025: slop · ABC News — ‘AI slop’ named Macquarie Dictionary word of the year 2025 · Graphite — More Articles Are Now Created by AI Than Humans (2025) · Harvard Business Review — AI-Generated “Workslop” Is Destroying Productivity (2025) · Shumailov et al. — AI models collapse when trained on recursively generated data (Nature, 2024) · Gerstgrasser et al. — Is Model Collapse Inevitable? (2024) · Google Cloud — Measuring the environmental impact of AI inference (2025) · Elsworth et al. — Measuring the environmental impact of delivering AI at Google Scale (2025) · Luccioni et al. — Power Hungry Processing (ACM FAccT, 2024) · Delavande et al. — Video Killed the Energy Budget (2025) · TechCrunch — Anthropic unveils new rate limits to curb Claude Code power users (2025) (2026년 10월 확인)